재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대편에서는 잠시 시간을 달라하곤 회의에 돌입했다. 일단 재혁이 말한 내용은 확실하다. 대충의 내용을 보면 단기는 아니고, 활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장, 또한 그 대우는 상위급 임원 수준이었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그만큼의 성적을 내줘야 하는 것, 그건 당연한 이치였다. (“시즌 중 좋은 성적을 내준다면, 저희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줄 방침입니다.”) 채찍과 당근, 그것이 모터스포츠팀에서 드라이버에게 줄 수 있는 대부분의 카드인 셈이다. 하지만 이글 모터스포츠는 달랐다. 영국에 독자적인 캠프까지 차려주겠다는 것이 더 들어가 있었다.
2013년 1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県), 오카야마역(岡山駅). 하카다, 가고시마 방면 플랫폼에 선 마츠자와 유카 이글 모터스포츠 일본 지사장. 그녀는 오카야마 국제 서킷부터 오카야마역까지는 회사 제공 승용차인 토요타 마크 GRX133(トヨタ マークX GRX133)을 이용했고 이곳에서부터 가고시마현까지는 기차로 이동할 방침이었다.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츄오쵸 45-1(鹿児島県鹿児島市中央町45-1)이라. 의외로 시내 쪽이네. 월세로는 비쌀텐데 말이야.’ 다행인 점은 소피아 네트 박사가 지금 일본에 있다는 것이다. 유카가 미리 송미옥을 통해 소피아 박사에게 요청했고 그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유카의 이번 출장이 가능해 진 것이었다. 참고로 유카는 소피아 박사와 그렇게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었다. 단장인 송미옥의 소개로 한 두 차례 만난 적이 있을 뿐, 일대 일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열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녀가 탈 열차는 11시 47분, 당역에서 출발하는 신칸센 사쿠라 553번이었다. 10시 59분, 신오사카역(新大阪駅)을 출발해 신고베(新神戸), 오카야마(岡山), 후쿠야마(福山), 히로시마(広島), 토쿠야마(徳山), 고쿠라(小倉), 하카다(博多), 구루메(久留米), 쿠마모토(熊本), 센다이(川内)를 거쳐 가고시마츄오(鹿児島中央)에서 종착하는 열차였다. 즉 산요-큐슈신칸센(山陽・九州新幹線) 직통인 셈.[각주:1] 물론 비행기를 이용해도 된다. 하지만 비행기는 오카야마 공항(岡山空港)이 아닌 오사카국제공항(大阪国際空港)[각주:2]까지 나가야하기에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정말 가능하겠지만, 사실 유카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11시 46분, 사쿠라 553호 열차가 오카야마역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카이도-산요신칸센(東海道・山陽新幹線/도쿄역-신오사카역-하카다역 직통)의 16량 편성과는 다른 성격의 열차였다. 산요-규슈신칸센은 규슈신칸센 구간에 있는 35퍼밀의 구배를 달리기 위해서인지, 전 차량 전동차라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고 이게 그대로 들어간 것이 바로 이 열차였다. 유카가 앉을 자리는 2호차에 있었다. 2호차에 앉은 그녀는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3시간의 여행을 시작했다. 간토 출신인 그녀가 규슈까지 간 것은 극히 드문 일인지라. 유카의 머릿속에는 ‘길만 안 잃어버리면 다행이겠네.’ 라는 생각이 있었다.
2013년 1월 22일 오전 11시(Pacific Standard Time),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USC Archangel Racing 북미 캠프. USC Archangel Racing은 전년도 1월, 북미국제오토쇼(North American International Auto Show, 통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발표된 신형 퓨전 스톡카를 전년도 11월에 받아 팀에 맞게 세팅하고 있었다. 865마력이라는 미친 성능에 V형 8기통 5.86리터라는 대배기량, 하지만 4단 수동미션과 기계적인 장치가 대부분인 아메리칸 스톡카는 유럽식이나 브라질식 스톡카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올해도 출력은 크겠는데요?” “865마력이라는 게 단순한 숫자는 아니지. 나스카의 자존심이니까. 올해도 한번 거하게 할 생각이네만.” “전체적으로 무거워지겠죠?” “별다른 것은 없지. 연료, 드라이버 다 빼고 3,200파운드가 나와야 하는데 말이야.”(참고 : 3,200파운드=1,451kg) “결국은 제 감량 능력에 달린 거네요. 연료와 드라이버가 포함되어서 3,400파운드(1,542kg)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쉽나요?” “식사량을 조절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보자고, David.” “네.” 2013년도 USC Archangel Racing의 일정은 다른 어느 팀보다 빠듯했다. NASCAR Sprint Cup은 2월부터 11월까지 총 36회 열리고, FIA GT Series 5라운드에 열릴지 미지수인 한 경기, 게다가 슈퍼 GT 8라운드에 후지 스프린트 컵이 마지막 대회로 남아있다. 총 49회 이상의 경기를 치러야하기 때문에 복잡한 것은 여느 팀 못지않은 상황이었다.
2013년 1월 22일, 오후 2시 43분, 대한민국 수도 서울. 이글 모터스포츠 본사 송미옥 대표가 누군가와 통화중이었고, 그 앞에는 강일준 팀 이글 코리아 감독이 앉아 있었다. 시즌 중 미옥이 유럽에 있을 시 국내 업무는 강일준 감독이 권한대행으로 총괄하는지라 강일준의 위치는 중요했다. “알았어요. 일단 만나게 되면 연락 주세요. 네.” 미옥이 전화를 끊고 소파에 앉았다. 강일준도 그녀가 앉은 후 소파에 앉았다. “작년 시즌, 어땠나요?” “아시다시피 KSF나 슈퍼레이스 쪽에서는 나쁜 편이 아니었습니다. DDGT도 그렇고요.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채미연 선수의 적응력은 상당합니다. 방학 기간이라 지금은 캠프 생활 중인데, 일단 올해는 아무래도 대학 수업과 병행할거 같다고 하더군요.” “휴학 중 아니었나요?” “장기 휴학이 어렵다고 해서, 일단 올해는 한 학기나 한 해 정도만 수업과 레이스를 병행할 거라고 합니다.” “대학 생활과 모터스포츠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강 감독님이 박 고문님과 협의해서 문제없는 활동을 하게 해주세요. 레이서로서의 성적도 중요하지만 대학 시절의 추억을 쌓는데는 무리가 없게 해야 하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KARA에서 스피라의 호몰로게이션에 대해 올해 통과되어도 서킷에 투입되는 건 내년에나 가능할 거라고 하더군요.” “예상했던 대로네요. 실전에는 1년 정도 걸리겠고, 최악의 경우 2년은 걸리겠죠. 그나저나 내년 슈퍼레이스에서 활동할 스피라의 사양은 어떻게 잡혔죠? 전 2,940cc 트윈터보를 생각했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아서 말이죠.” “대표님 말씀대로 아무리 따져보아도 전에 발표하신 2,940cc는 좀 무리인거 같더군요. 그래서 기술팀과의 합의 끝에 3,000cc 자연흡기로 했습니다. 고회전형이고요. 최대회전수 12,000rpm입니다.” “GDi겠죠? 람다 2 엔진인.” “맞습니다. 크랭크 출력 기준 300마력인데 기술팀에서 400마력 내외로 잡고 있습니다.” “400마력 내외라, 유럽에서 출력 높은 차들이 싸우는 거 보다가 국내로 눈을 돌리면 좀 그렇겠네요.” “과거 GT Masters도 400마력 이상이었죠. 뭐, 슈퍼 레이스 GT 클래스는 1.6리터부터 5리터까지 벌이는 대결이니 더 재미있습니다만.” “두고 봐야 아는 거죠.” “아, 그나저나 대표님. ‘그 남자’를 정말로 끌어들이실 생각이십니까?” “최종 선택은 ‘그’의 몫이죠. 다만 우리는 그걸 제안해 볼 뿐입니다. 단순하게 제안만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제안을 해보는 것이 전부에요.”
동 시간, 유카가 탄 열차는 센다이(川内[각주:3])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지연률이 낮은 열차답게 열차는 거의 정시에 가고시마추오역에 도착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적어도 2호차 안은 조용했다. 낮 시간대, 그것도 평일이다. 이용할 인원은 거의 없지만 그녀처럼 출장을 위해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 이 시간대였다. 열차를 타고 한참 가는 길에 울린 휴대전화의 진동소리에,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문자의 주인은 소피아 네트 박사.
마츠자와 지사장님, 가고시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본사의 송미옥 대표으로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먼 길 오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고시마츄오역 1번 출구로 나오시면 은색 볼보 V40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니, 그 차 앞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럼 역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유카는 문자를 확인한 후, 잠시 동안의 생각에 잠겼다. 센다이를 향한 열차는 이제 종착역인 가고시마츄오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가나가와현 하코네쵸, 운동역학연구소 이곳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생물학 관련 연구소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차세대 동력기의 성능에 대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는 곳이다. 차세대 자동차 엔진에 대한 연구도 그 중 하나이지만, 의외로 클린 디젤에 대한 연구는 이뤄지지 않는 셈. 이는 일본의 자동차 업체가 친환경 자동차를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유럽에게 디젤 엔진 기술이 밀림을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곳의 소장실. 두 남녀가 소파에 앉아 대화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신문을 보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조용하게 넘어갔는데 올해는 안 그러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올 시즌에도 작년과 동일하게 할 거니까.” “여보, 그런데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차를 투입한다는 것은…….” “상관없어. 당신도 독일에서 봤잖소. 리스트럭트가 걸리겠지만, F1에서 쓰는 기술을 그대로 스포츠카에서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 아니겠소?” “그건 그렇지만 JAF(日本自動車連盟)나 GT Association의 허가는요?” 한 5분 정도 정적이 흘렀을까? 그리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 저…… 그게…… 미안, 유이.” 잠시 후, 연구소 직원들은 연구소장이 누군가에게 처절하게 맞는 소리와 연구소장의 입에서 나온 비명을 들었고 직원 중 한 명이 119에 전화하다가 누군가에게 저지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 시 가고시마츄오역을 나온 유카의 눈에 띈 차량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볼보 V40. 은색이라는 컬러 때문일까? 한낮의 햇빛을 받은 모습은 더욱 시리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도착하셨군요. 마츠자와 지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사님, 작년 가을 후지에서 뵙고 오랜만이시네요.” “그러게요. 그때 마츠자와 지사장님 얼굴이 영 좋지 못해서 알고 보니 경주차 문제였죠?” “아, 그거 말이죠. 박사님께서 금세 확인하셔서 문제를 해결했지만 결국 독일에서 기술팀을 불렀죠.” 유카와 소피아 간의 대화는 처음부터 전년도 후지 스피드웨이 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2012년 9월 9일에 있던 슈퍼GT 6라운드. GT300에 출장하던 이글 저팬의 BMW Z4 E89 GT3 경주차가 후지 스피드웨이를 달리던 도중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 마침 그 후지 스피드웨이에는 소피아 본인이 가족들과 함께 구경나온 상황이었는데, 미옥의 연락을 받은 소피아가 유카의 도움을 받아 패독에 들어가 대략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임시로 브레이크 패드를 바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브레이크 부분이 전체적으로 맛이 간 상태였다는 것. “아, 그때 생각만 해도 끔찍했어요. 그때만 생각해도, 정말 싫어지네요.” “그렇겠네요. 그나저나 오늘 오신 것은 제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서이신가 보죠?” “네. 일단 차에서 이야기 하죠.” “그러세요. 타시죠.”
가고시마츄오역에서 소피아의 집까지는 차로 약 15분 정도 걸린다. 유카는 이날 소피아에게 송미옥 대표가 준비한 사항을 언급했다. 확실히 미옥은 이번에 작정하고 드라이버를 모을 기세였다. 오죽하면 설득하기 어려울 거 같은 젠가를 설득해 1시즌이라도 선수로 활동해 달라고 유카에게 연락을 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유카의 표정은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다.
이번 편은 드디어 오리지널 4개 팀 중 2개 팀이 새로 등장했습니다. 특히 하코네쪽.... 기대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번 편과 다음편은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잠시 설명을 드리자면, 규슈 신칸센[九州新幹線] 중 가고시마 루트가 지난 2011년 3월 12일에 완전 개통되었는데, 이거 개통하면서 종전에 800계 신칸센만 쓰던 JR규슈가 JR서일본과 함께 신형 열차를 도입했는데, 그것이 신칸센 N700계 S・R편성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열차는 N700계 553A 열차가 모델인데, 여기서는 신오사카에서 출발하는 열차인 만큼 N700계 S편성이 등장합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