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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칼럼

국산 최초의 자동차 시발

올해 2005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제차량공업의 최 무성 3형제가 1955년 미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 차축 등을 이용해 드럼통을 펴서 만든 최초의 국산차가 바로‘시발 자동차’이다. 시발 始發은 이름 그대로 우리 자동차공업의 시발점이 된 자동차로 볼 수 있다.
세계자동차의 시발점인 1769년 프랑스군인 이었던 ‘니콜라 조세프 퀴뇨’가 증기엔진 3륜 자동차를 최초로 만든 지 136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의 자동차 디자이너는 항상 새로운 형태의 자동차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90년대 이후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한 고유모델 자동차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디자인에서, 성능에서, 기술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의 이름으로 세계의 선진 자동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정상을 향해 질주를 하고 있다.
여기서 최초의 국산 자동차가 비록 고유 디자인은 아니지만 자동차 디자인의 밑거름이 된 자동차이므로 50주년을 맞이하여 되돌아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최초로 등장한 해는 190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즉위 40주년을 맞아 미국 공관을 통해 포드 승용차 1대를 의전용 어차로 들여온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종의 어차는 이듬해인 1904년 러일전쟁 중에 자취를 감추어 현재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물론 1890년대 후반 서양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갖고 들어온 차가 있었지만, 정식 절차를 밟아 국내에 수입된 차는 어차가 처음이기 때문에 1903년을 한국 자동차의 원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들여온 1903년 이후부터 6.25사변이 일어났던 1950년 사이에는 우리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마차도 없이 가마로 대신하던 조선시대의 모습처럼 말이다. 노력이 있었다면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정비소에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1912년경에 일본사람이 포드 T형 승용차를 들여와 자동차 운송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의 기계공업분야는 불모지나 다름없었으므로 자동차공업의 기초는 엄두도 낼 수 없었으나, 운송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자동차 수리업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 인사동에 자리 잡은 강천 자동차에서 왕실용 자동차를 수리한 것이 자동차서비스공업의 시초라 생각된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내버스 운행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27년까지만 해도 서울, 부산, 평양 같은 대도시의 대중교통수단은 택시 아니면 전차와 9~10인승 승합자동차가 전부였다.
그런데 대구에서 1920년에 처음으로 시내버스가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당시 영남 내륙의 중심도시로 섬유산업이 발달하던 대구에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자 한 일본 기업인이 시내버스 정기노선을 개설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4대가 도입된 시내버스는 대구역을 중심으로 시내 각 방향을 비롯하여, 북쪽으로 팔달교까지 통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곳곳에 정류소가 설치되었으며,
전차와는 달리 중도에서 타고 싶은 사람이 손만 들면 정차해 손님을 태웠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이로부터 8년 후인 1928년에 시내버스가 도입되었다. 그해 2월 지금의 서울시청인 경성부청에서 10대의 20인승 버스를 구입하여, 서울시내 간선도로에 투입해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인 전차를 보조하도록 하였다. 당시 서울 시내버스는 6개 노선이 개설돼 시내를 운행하며 갖가지 화제를 뿌렸는데, 운행 초기에는 호기심에서 당시 승차요금인 50전을 내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29년에는 광주에 한국인이 경영하던 자동차 학교가 개교된 바 있는데 끝까지 발전하지는 못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1930년에는 조선자동차회 연합회가 발족되었고, 그 후 8.15광복을 맞아 일본사람들의 정비공장이나 철판공장에서 일하던 우리 기술자들이 대한자동차공업협회를 발족하지만 6.25사변으로 인해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와중에서도 1944년에 창립되었던 경성정공이 1952년에 지금의 기아자동차인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바꾸면서 3000리호 자전거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당시는 제품디자인의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나 자동차 공업 역사로서의 발자취는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계공업의 발전과 함께 드디어 1955년 8월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 무성, 혜성, 순성 3형제가 미군으로 불하받은 지프차를 개조하여 만든 첫 국산자동차 ‘시발자동차’를 만들게 된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인 시발은 지프형 승용차로써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다가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으며, 국산화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하였다. 하지만 차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나 걸렸으며, 시발 자동차의 값이 당시 8만환으로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때 국제차량공업회사가 ‘시발자동차’를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됨과 동시에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을지로 입구에 있던 그의 천막 공장에는 시발차를 사가려는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가격도 하루아침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국제차량공업은 대통령상을 받은 후 한 달도 못되어 1억 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이 돈으로 공장도 사고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서 양산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서 생산능력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이렇게 인기가 좋다보니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얼마 후 시발 투기 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선 ‘시발계’까지 성행하여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당시 국내 자동차업계는 1955년으로 들어서자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자동차의 수도 늘기 시작하였다. 1954년에 15,950대였던 것이 1955년에는 18,356대로 늘어났고, 1956년에 가서는 25,328대로 급증하였다.
이렇게 되다 보니 휘발유 소비도 계속 늘어만 갔다. 1955년에 3,360만 갤런을 사용하던 것이 다음 해인 1956년도에는 5,817만 갤런으로 73%나 급증하였다. 이러다가는 석유파동이 염려되었고 그래서 정부는 긴장하였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되었고 그 결과 긴급조치가 발동된 것이다. 바로 1957년 5월 8일자 기준의 전국 자동차 수를 넘지 못한다는 조치이다. 폐차가 되기 전에는 자동차 제작은 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자동차공업이 존립할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자동차업계는 황색딱지라는 것이 공공연히 거래되었는데 자동차를 한 대 제작할 수 있는 허가서였다. 폐차를 하면 폐차한 대신 황색딱지를 한 장 받아서 이 딱지를 갖고 가면 시발자동차 한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시발자동차 한 대 값이 약 400만환인데 딱지 값이 100만환으로 너무 가격이 컸다.
시발자동차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폐차가 되고 난 후 가지고 오는 황색딱지만 가지고는 회사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에 사정하게 되었고 매달리는 곳은 엄연히 자동차공업은 상공부 공업국 소관이지만 상공부가 아닌 황색딱지를 떼어 주는 교통부 육운국라고 한다. 육운국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이 최고상까지 준 시발차인데, 그래도 명목만이라도 유지해야 하지 않습니까?’하며 굽신거리고 애원을 하였다. 그 결과 지금은 상상이 안가지만 기분이 좋으면 황색딱지의 장수가 좀 많아졌고 무슨 사정이라도 있으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게 생산되던 시발자동차도 우리나라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맨 처음 광고를 한 자동차라는 기록도 있다. 이 차는 지프 형 4기통 6인승으로 광고에는 제작처가 ‘국제차량주식회사’로 되어있고, 소재지는 ‘종로구 관수동’으로 되어있었다. 광고는 대통령상 수상 직후 시판과 함께 서울의 각 일간지에 게재되었다.
중앙에 여성모델과 함께‘시발’의 모습이 실려 있는 광고 지면은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자동차 광고라면 일제 때에도 숱하게 있었고, 자동차뿐이 아니라 요즘처럼 각종부품이나 용품을 선전하는 광고도 매일 실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미국이나 독일제품 차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한국인이 자동차를 만들어 선전하는 광고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차는 엄연히 한국차로 생산된 것이었다. 광고에는 글귀가 많이 들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 자동차 발매개시’로 되어있는 타이틀에 자동차 이름은 로고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로고는 한글로 ‘시’자와 ‘바’자를 쓰고 ‘바’자 옆에는 ‘ㄹ’만을 따로 연결하였다. 차체에 있는 차 이름도 그렇게 되어있었다. 다른 글귀를 살펴보면
*‘넓은 아세아에 있어서 자동차를 제작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넣어 2개국뿐이오니 이차를 사용함으로써 반만년 문화민의 자부심을 가집시다.’
*‘외래 고급차를 보면 세 가지 의아심이 나는데, 첫째로 탄 사람이 면괴스럽고,
둘째는 지내 보내는 사람이 불쾌하고, 셋째로 그 유지비가 걱정스러울 지경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심정을 일소하게 될 ‘시~발 자동차를 애용 합시다.’
*‘내무부, 교통부, 상공부 합동 시승회시에 시속 90KM 평균 장거리 시승을 마치고, "그만하면 훌륭합니다. 많이 보급시킬 방도를 차립시다."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훌륭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자동차로서의 주행능력은 인정을 받은 듯하다.
*‘지금 이 차를 보급하기 위하여 엔진대가는 사용해보시고 1년 후에 주셔도 무방하다는 주문기간이오니 꼭 사용 하십시오.’
* ‘자가용은 물론 이옵고 영업용 택시로 최적의 하옵고, 연료비 유지비가 최소하고, 우리나라 실적에 꼭 맞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할 말은 다 했을 법한데 맨 마지막에 시선을 끄는 글귀가 하나 더 있다.
* ‘여러분! 우리나라를 외국인에게 자랑할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선 이 ’시~발‘차를 타고 여의도 공항장에 나가십시오. 얼마나 외교의전에 도움이 될까요!’-
당시 국제공항은 여의도에 있었는데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매우 인상적 광고라 보여진다.
이렇게 국내최초 광고도 하였지만 시발자동차의 인기도 오래가지 않았다. 정부가 그동안 새로운 차 개발에 많은 돈을 사용하였으며 5.16혁명으로 정부 보조금이 끝 난데다가 1962년 산뜻한 ‘새나라’자동차가 쏟아져 나오자 큰 타격을 입게 된 것 이다. 이 차는 1963년 5월까지 3천여 대를 만들어 판매하였다.
그 후 1962년 정부의 자동차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최초의 근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이 인천 부평에 ‘새나라 자동차’가 설립되었고, 이후 여타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자동차조립공장을 설립하면서 자동차 산업의 체계가 잡혀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조립용 부품을 들여와 조립 판매하는 단순 조립단계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지난 회에 설명되었듯이 1975년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등장하면서 처음으로 우리 브랜드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으며, 그 이후 포니는 자동차 수출과 국내 마이카 시대를 선도하며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든든한 초석이 된 자동차로 기억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 최초의 ‘시발 자동차’가 탄생한지 50년이란 짧은 기간의 자동차공업의 역사 속에서도 국내 자동차산업은 생산실적으로 세계 5위, 수출 6위의 명실상부한 자동차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의 수준 역시 독일·미국·일본 자동차에 거의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좀 더 혁신적인 디자인과 브랜드 이미지 향상이 남은 과제라 하겠다.


박귀동 [trend@daumtrend.com]

기사&사진 제공 : 오토조인스(http://www.autojoin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