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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칼럼

大政奉還 (타이세이호칸)- 豊田(도요타)家門의 歸還

대정봉환이 뭐냐고요? 일본사에서 메이지 유신의 끝을 알리는 일대사건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 및 무가 정치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뭐, 박상원씨가 이렇게 적은 것에도 다 이유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효, 읽어보세요.

大政奉還 (타이세이호칸) – 豊田(도요타)家門의 歸還

1. 서두: 한 닛산맨의 ‘예언’
1990년대 말, 경영난으로 프랑스의 르노자동차(Renault S.A.)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일본 3대 자동차 회사 중 하나인 닛산(日産)은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외국인을 사장으로 맞이하면서 대대적인 경영수술에 들어갔다. 당시 NRP(Nissan Revival Plan)이라는 계획으로 경영정상화를 추친해 나가던 닛산의 한 관계자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논조의 말을 했었다. ‘우리[닛산]은 이제 대기업병을 고치고 있지만, 토요타는 훗날 그들의 대기업병을 고쳐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때 ‘닛산맨’의 발언은 오늘의 토요타를 제대로 내다본 것인지도 모른다.

글/박상원(자동차 칼럼니스트)

2. 도요타 가문의 대정봉환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끝[각주:1]으로 도쿠가와 막부[각주:2]가 300여년간 통치하면서 쇄국정책을 펼쳤으나 19세기말 일본 해안 곳곳에서 개방을 요구하는 서방 군함들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와중인 1867년 몇몇 지방 군주들은 천황 –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일왕으로 하지만 기사상 천황으로 한다 – 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을 주장, 도쿠가와 막부에게 왕정복귀를 요구하였다. 세력이 약화된 막부는 이에 굴복, 천황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해체되었으며 결과적으로 675년간 일본을 지배한 막부 정치체제를 붕괴시킨 본 사건을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고 일컫는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지난 2009년 1월20일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토요타 자동차에서 발생했다.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의 손자인 도요타 아키오 부사장이 3명의 다른 부사장들을 물리치고 차기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14년만에 도요타 가문이 경영권을 다시 획득한 것이다. 미국 비지니스위크(Business Week)의 한 기자는 현재의 험난한 경영환경 – 토요타의 경우 2008년 하반기 미국시장에서의 판매량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최대 30% 이상 급감한 상태였다 – 중에 왜 경영진 교체가 이루어 졌는지 의아해 했지만 10년 전 닛산 관계자의 발언을 되새겨 보면 토요타에게 지금이야말로 경영혁신의 적기일지도 모른다.

1937년 이후 토요타 자동차에서 사장으로 재임한 사람들은 총 10명으로 이중 5명이 창업가문인 도요타 출신이었다. 1985년 당시 사장이었던 도요타 타쓰로가 심장병으로 입원하면서 도요타 가문 중에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없자 30년만에 처음으로 비(非) 도요타 가문 출신의 경영자를 앉히게 된다. 바로 그가 오쿠다 히로시였다. 오쿠다 사장은 토요타 자회사들을 적대적 인수하려던 외부세력에 대해 성공적으로 대처하였고, 이와 같은 전문 경영인의 성공은 도요타 가문이라고 해서 사장으로 대표되는 경영권을 물려줬던 과거의 전통을 끝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오쿠다 사장 이후로 2명의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맞았던 토요타에게 심상찮은 조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선 1990년대 말부터 미국 시장에서 토요타 자동차들의 일부 차종의 고장률이 높아져 소비자들의 불평이 높아져만 갔고 언론에게까지 보도되는 사례가 발생했다. 미국시장에서 품질의 토요타라는 오래된 브랜드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오랫동안 토요타라면 거의 모든 차종에 추천 (recommended)를 부여하던 대표적 소비자 전문지인 Consumer Reports가 2007년 평가에서 토요타의 대표 차종인 캄리를 비롯 툰드라 그리고 렉서스 GS를 비 추천 목록으로 하향 강등시켜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불량률 증가와 경쟁사들의 제품 품질 향상 – 아이러니컬하게도 토요타의 생산방식을 연구해서 달성된 것이 대다수였다 – 이라는 문제들은 오쿠다 사장 이후 토요타의 전문 경영인 체제의 경영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사실 1999년 오쿠다 사장이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의 사장들 (조 후지오, 와타나베 가츠아키)이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사장을 지냈던 도요타 쇼이치로 사장에 비해 뛰어난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도요타 아키오 부사장의 부친인 도요타 쇼이치로는 오늘 토요타의 큰 수익원으로 발전한 렉서스 브랜드를 런칭한 장본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토요타를 세계적인 친환경적인 회사라는 이미지로 탈바꿈해준 세기적인 역작, 프리우스 (Prius) 하이브리드 자동차조차 그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전문 경영인 체제였던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토요타의 차종들은 도요타 쇼이치로 이후 큰 변함이 없었고 전세계 시장에서의 양적인 성장을 통해 GM을 능가하는 세계1위의 기업이 되자는 것이 경영목표가 된 것 같았다. 이에 대해 도요타 쇼이치로와 오쿠다 히로시를 포함하는 토요타 원로들은 최고경영진의 능력에 대해 걱정한 듯 하며 토요타가 미국 텍사스에 미국의 8번째 공장을 세우게 되자 이 결정에 의문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토요타가 미국에 다수의 생산시설을 세우게 된 것은 미국시장에서 늘어나는 판매량에 따른 미국 내 반감을 고려한 것이다. 즉, 이러한 현지 생산시설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직업을 제공하여 시장에서 증가하는 토요타에 대한 미국 내 정치적, 사회적 반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토요타 원로들의 급속한 생산능력 증가에 대한 걱정은 불행하게도 현실화되었다.

2008년말 뉴욕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붕괴와 시작된 금융위기는 미국 내 실물경제에게도 전이되었고, 2008년 하반기에 급속도로 냉각된 미국 소비자들의 구매심리를 토요타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결국 2008년 12월 15일, 북미에서 쌓여만 가는 재고를 줄이기 위해 최신시설의 미시시피 공장에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결과들은 토요타의 원로들이 와타나베 사장의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든 듯 하다.

3. 대기업병에 맞서라
2008년 전 세계에 880만대의 자동차를 팔아 세계 1위의 자동차회사가 된 토요타. 하지만 1등에서 추락한 GM의 모습을 보면 1등이란 위치는 몰락이란 저주가 함께 동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세기 초반에 대량생산 방식을 고안했던 포드자동차를 추월한 이후 거의 100년간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였던 GM. Tiered and segmented product, 즉 초.중.고급 차종들을 서로 중복되지 않는 다양한 브랜드들에 배치하여 소비자들을 유인하였던 알프레드 슬론 (Alfred Sloan) – MIT출신의 엔지니어로 GM의 2대 회장으로 근대경영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경영자–, 미국인들에게 뛰어난 자동차 디자이너로 기억되는 할리 얼 (Harley Earl)등 쟁쟁한 인재와 실력을 지닌 GM이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왜곡된 노사관계, 악화된 생산성 등으로 2009년 스스로를 분해해야하는 상황에 했다.

한때 스승으로 여겼던 GM의 현 상황이 토요타 원로들에게 일종의 반면교사가 되었을까. 도요타 아키오도 인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 토요타는 관료주의적이며 두터운 층의 관리제도, 일본중심적인 사고방식 및 소극적인 경영방식이라는 대기업병에 중독되어 가고 있었으며 최근의 경영실책에서도 드러나듯 전례가 없는 대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4개월 후 토요타의 수장이 될 도요타 아키오는 누구이며 회사는 어느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 그가 누군인지 잠깐 살펴보자.

4. 토요타 아키오
도요타 아키오는 토요타 자동차 임원들에게서 보기 드문 해외파이다. 1956년 일본 나고야 태생으로 1979년 게이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1982년 미국 매사추세츠에 있는 밥슨대학(Babson College)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었다. 졸업 후 할아버지의 회사인 토요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뉴욕과 런던에서 투자은행가와 컨설턴트로 근무했었다. 하지만 포르쉐 가문 출신들이나 포드 가문 출신들의 전례들과 비슷하게 그도 도요타라는 창업가문의 이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27살의 나이에 토요타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던 그에게 아버지인 토요타 쇼이치로 사장은 처음에 이를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1984년 토요타에 입사하게 된 도요타 아키오는 북부 캘리포니아의 프리몬트(Fremont)에 위치한 GM-토요타 합작사인 NUMMI (New United Motors Manufacturing Inc.)에서의 근무를 포함 다양한 직책을 거치게 된다. NUMMI 시절 함께 근무했던 토요타 측 미국동료들은 그가 영어를 매우 잘 구사했으며 검소하고 자신이 도요타 가문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입사에 관련되었던 아버지의 걱정이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사내에서 아키오에게 닥친 문제는 일본인들과 일할 때였다. 창업자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 때문인지 업무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한번은 직속 상사와의 불협화음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질시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가 25년 동안 토요타에서 쌓은 업무성과는 아버지를 비롯 토요타의 원로들에게 사장 후보감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52세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토요타 제국을 이끌어 가는 초석이 되었다.

신임 사장이 토요타에 가지고 올 변화를 예상해본다면 우선 글로벌 기업에 맞는 기업 문화의 변화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토요타 본사의 일본중심의 경영방식은 해외의 직원들에게 불만의 소지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토요타 본사 이사진 중 그동안 선임된 외국인이 2명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두 명조차 결국 회사를 관뒀다는 점에서 우리는 토요타의 기업문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토요타의 첫 번째 외국인 이사였던 짐 프레스(Jim Press)는 크라이슬러 부회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갔다. 수십년간 북미 토요타에서 근무한 토요타 맨으로 북미 토요타 회장까지 지냈던 그는 크라이슬러로 이직한 후 자신의 옛 회사에 대해 쓴소리 – 예를 들어 토요타 프리우스의 개발에 일본 정부가 지원을 했었고 이는 불공정한 사례라고 공개 발언했었다 – 를 하기에 이르렀다. 토요타에 충성을 다했으나 뛰어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가이진(일본말로 외국인)’으로 본사에서 받은 차별에 쌓인 불만이 뒤늦게 표출된 것일까. 아무튼 과거의 토요타 사장들과 달리 영미권에서 근무했고 영미권 문화를 잘 이해하는 도요타 아키오의 등장은 국내외 인재들을 토요타 사상 처음으로 요직에 기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경영능력의 강화를 예상하게 해준다.

사실 토요타에 닥칠 변화의 예고편은 이번 2월21일 발표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직 토요타 임원인 이나바 요시의 복귀이다. 이나바 요시는 북미 토요타 판매 (TMS) 사장 출신으로 1968년 교토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대 중반에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켈로그 (Kellogg)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에서 받았으며 토요타의 미국, 중동, 유럽등 해외 오퍼레이션에서 근무한 해외통이다. 이러한 면에서 도요타 아키오와 유사한 점이 많으며 이나바 요시가 신임 사장의 최측근이 될 가능성을 한 층 높이고 있다.

이나바 요시의 기용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과거 일본 자동차 업계에서 퇴직자를 데려 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는 점이며, 도요타 아키오가 향후 토요타를 운영해 나갈 방향을 예고하는 첫 사례일 수 있다는 점이다. 토요타 내부자에 의하면 이나바 요시의 첫 임무는 판매량 격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미 토요타의 판매망을 재정비하는 것이며, 머지 않은 시점에 북미 토요타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토요타의 제조 및 제품개발 분야들도 전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도요타 아키오가 신경을 쏟고 있는 또 다른 사안은 렉서스이다. 토요타의 고급브랜드인 렉서스는 1989년 미국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경쟁업체들에 비해 판매량이나 수익성에서 성공적이였지만 도요타 쇼이치로가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다. 렉서스 차종들을 보면 베스트셀러인 크로스오버 RX350을 제외하고 경쟁사들의 경쟁차종들에 비해 판매가 저조하며 SC 컨버티블과 같은 차종의 경우 아직 후속차종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없다.

더욱이 할로카(halo car ; 상징적인 자동차)로 개발되었던 LF-A 초 고급 스포츠카는 수년째 출시 소문만 무성한 채 소비자들을 혼란시키고 있는 등 렉서스는 제품적인 면에서 아직까지도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다. 이에 도요타 아키오 부사장은 NUMMI 재직시절 동료출신이기도 한 미국 내 렉서스 담당 매니저 등에게 렉서스와 관련 최근에 많은 문의를 하고 있다고 전해지며, 그의 이러한 움직임은 현대의 고급 브랜드 진출 움직임과 시기적으로 겹치고 있어서 흥미롭다 하겠다.

5. 토요타 경영을 가이젠 (改善)하라
도요타 아키오가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십수년 전의 한 인터뷰에서도 말했듯이 사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처럼 도요타 가문의 경영 재 참여는 모두의 환영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사내의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원로들의 지지가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토요타 내부에 형성된 대기업병을 수술하면서 발생할 내부와의 마찰, 그리고 힘든 경영환경에서 더 격화될 경쟁업체들의 도전에 있어서 토요타 구성원들의 단결과 이해가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도요타 아키오에게 있어서 도요타라는 창업가문의 성이야말로 향후 토요타에 발생할 변화에 따른 고통을 조직원 모두가 이겨내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에 머물던 일본이 大政奉還 (타이세이호칸)을 통해 새롭게 수립된 천황 지도체제 아래 근대화되었듯.




하여튼 토요타는 알아줘야 해요. -_-;;;; 
기껏 돌아온게 다시 도요타 가문 사람이라니. ㄱ-
다시 창업자 일가가 해 먹겠다는 소리로군. ㄱ-


기사 제공 : 글로벌 오토뉴스

  1. 이건 뭔가 맞지 않는데, 임진왜란은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기의 말년에 발생한 일대 사건.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의 난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2.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시기는 1603년. 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