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폭로부터 하자면 이 차 때문에 본인 뿐만 아니라 rex씨, 그리고 rex님의 블로그에서 그것을 본 여러분도 같이 낚였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해 주고 싶군요. rex씨! 우리는 재규어에게 당한 겁니다.
운영자를 낚은 바로 그 글

재규어 신형 XK는 명백한 스포츠카다. 그밖에 달리 부를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스포츠카다. 단순히 XJ의 스포츠 버전이 아니다. 느낌이, 사운드가, 회전과 달리기가 분명 XJ 방식과 다르다. 재규어가 바라는 바가 뚜렷이 드러난다. BMW 645Ci를 몰아보면 멋지다. 그런데 545i 투어링의 스티어링 휠을 잡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XK는 645Ci 수준의 안락성과 품격을 겨냥한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스포츠카의 근성도 굳게 지켜내려 한다. 포르쉐 911 기본형을 노려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지금 최신형 XK 프로토타입의 ‘조수석’에 앉아있다. 안타깝게도 운전석은 재규어 수석 개발 엔지니어인 마이크 크로스의 차지. 세상에서 XK를 가장 잘 알고, 이 차를 빚어내느라 온갖 술수를 총동원한 장본인이다.

운전석은 머지않아 모두에게 개방될 것이다. V8 엔진의 멋진 사운드가 계기판 너머 윈드실드를 통해 콕핏으로 들려온다. 액셀 페달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배기 사운드가 드세다. 큼직한 회전대와 드로틀이 토해내던 지난날의 포효가 가슴을 울린다. “미국식이 아니라 영국식 V8 사운드를 살리려고 한 거예요.” 크로스의 말이다. 6단 자동기어는 제대로 들어맞은 선택. 각 기어 단수 사이를 쏜살같이 오가며 고속과 저속 커브를 박차고 나갔다. 애스턴 마틴에서 느꼈던 V8 파워,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바삐 움직이는 트랜스미션이 그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려 든다. 크로스는 스티어링 휠에 달린 패들 시프트를 썼고, 기어박스는 빈틈없이 반응했다. 스포츠 오토 모드로 전환. 기막히게 돌아간다. 특히 코너 브레이킹을 위해 기어를 일찍 조작할 때 그랬다. 포인트를 알리기 위해 듬직하게 드로틀을 밟았다.

무게가 줄면서 스피드가 살아났다. XK는 BMW 6시리즈나 벤츠 SL보다 훨씬 가볍다. 수평대향 6기통 한 가지로 무장한 911보다 조금 무거울 뿐이다. 따라서 조향감이 뛰어나다. 심지어 저속 코너에도 쏜살같이 뛰어든다. 개발팀은 조향 감각과 자신감을 심기 위해 처음에 약한 언더스티어를 넣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언더스티어는 사라진다. 커브를 예리하게 빠져 나오자 주행안정장치 램프가 깜박였다. 그런데도 매끈하게, 살짝 파워 다운이 일어날 뿐이었다. 이런 도로에서도 그립은 선명하고 알찼다. 아주 까다로운 오르막 코너와 만나도 거침없었다. 노면을 억세게 거머쥐고 달려나갔다.
마이크 크로스는 스티어링 휠을 거칠게 몰아부쳤다. 살짝 건드려도 응답했고, 손가락 끝으로 휠을 놀려도 이상 없을 정도였다. BMW의 무거운 댐핑 휠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휠에서 손을 떼고도 우툴두툴한 도로를 날렵하게 미끄러져 나갔다. 앞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크로스가 말했다. “한계 감각이 끝내주는데요.” 조수석에 앉아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같은 도로에서 애스턴 마틴 밴티지 V8은 흡족하지 않더라고 대답했다. 그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제구실을 했다. 차체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으므로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재규어의 페달은 상당히 가볍다. 때문에 운전할 때 큰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
그럼 승차감은? 오, 역시 재규어다. 큰 요철을 덥석덥석 삼켜 노면 소음도 크지 않다. 20인치 타이어를 신은 XK 쿠페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사실 심하게 달달거리는 노면과 자갈길에서는 살짝 신경질을 부린다. 그러나 19인치 휠을 끼운 카브리오로 갈아타자 반응이 달랐다. 댐퍼 조율이 약간 다르고 한결 부드럽다. 크로스는 이 세팅이 양산차에 그대로 들어간다고 했다. 아무튼 19인치가 좀더 조용하고 전체적으로 나긋나긋하다. 하지만, 처음에 느꼈던 상큼한 스티어링 휠 감각은 사라졌다.
카브리오의 단단한 주행감각이 감탄을 자아냈다. 고속으로 달리다 한쪽 바퀴가 솟아오른 맨홀을 타고 넘었다. 앞바퀴에 이어 뒷바퀴까지…. 하지만 그런 뒤에도 차가 뒤틀리지 않았다. 많은 카브리오 라이벌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럴 땐 사실 쿠페가 한발 앞선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믿음직한 게 비싼 값을 한다.

공식 도로시험과 미국 내 홍보 기간은 아직 3개월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두가 기다려야 할 때 나는 이미 XK 안에 앉아있다. 거의 완성된 차가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의 신기하고도 황량한 풍경 속을 고속으로 달린다. 이 곳은 바로 아일랜드 출신 록밴드 U2가 그들의 걸작 앨범 표지를 찍었던 장소. 그 때 그들이 어디쯤 서 있었나 궁금했다. 하지만, 똑 같은 장면이 반복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게 돼버렸다.
XK도 여느 21세기 차와 다를 바 없다. 컴퓨터 디자인 과정을 통해 거의 완성된 모습으로 태어났다. 다만 컴퓨터 작업을 계속하면서, 실제 테스트를 병행해왔다. 개발 초기에는 XJ 세단 몇 대를 두들겨 XK 시험용 보디를 만들었다. 휠베이스를 잘라 XK에 맞췄고, 엔진 냉각용 공기의 흐름을 실험하기 위해 XK의 노즈를 달았다. 밸러스트(무게중심을 맞춰주는 추-편집자 주)를 이용해 XK의 무게 배분을 점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파워트레인과 서스펜션의 예비시험을 마쳤다. 일단 XK 프로토타입이 완성단계에 들어가자 기계상의 큰 변화는 하나밖에 없었다. 전체 기어비를 낮추는 것. 그렇지만 완성형 차체 개발 단계는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었다. 수천 가지 미세한 손질을 계속하면서 차를 다듬었다. 거기서 개성과 독특한 감각이 살아났다. 바로 유명한 ‘재규어 표준(Jaguarness)’이 태어난 것이다.
2005년 5월 중반에도 그 같은 손질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크로스와 함께 위장된 프로토타입을 탔을 때였다. 그가 좋아하는 영국 미들랜즈의 짧은 도로 구간을 달리고 있었다. 작업 목록은 제법 길었고, 그 중 상당수는 뻔한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승차감이 빗나갔다. 너무 터덜거리고, 너무 빡빡했다. 조수석에서도 재규어 표준이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엔진 사운드가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크로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확실한 보장을 원했다. 천천히 달릴 때 V8이 너무 시끄럽지 않을까? 요즘 소비자 여론조사에 따르면, 너무 시끄럽다고 여겨지는 차는 실격이다. 그래서 V8의 파이프를 좀더 뒤로 빼내야 했다. 크로스는 스티어링의 문제점도 찾아냈다. 커브에서 너무 기울어 민첩성이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사소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자동기어가 상큼하지 않고, 변속 때 뜸을 들였다. 노면 소음도 너무 컸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크로스는 “재규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시동 모터가 시끄러웠다. 실험에서는 좋았는데 방향지시등이 갑자기 ‘삑’ 소리를 내어 깜짝 놀랐다.
그럼에도 가볍고 단단하고 힘찼다. 전체 기어비는 정밀 계산으로 결정한다. 목표는 최고의 경제성과 성능. 크로스는 최종 기어비를 낮추기로 했다. 그 결과 2단으로 시속 60마일(약 96km)에 도달할 수 없었고, 0→시속 60마일 가속 시간도 약간 늦춰졌다. 반면 실제 운전에서 많이 쓰이는 시속 50→70마일과 70→90마일 가속은 빨라졌고, 펀치력도 있었다. 연비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는 지난 6월 굿우드에서 XK를 시승했다. 상세한 내용은 만화를 곁들여 <탑기어>에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크로스가 운전석에 앉고, 내가 윈도 밖을 내다보며 힐 클라임에 도전했다. 잔뜩 겁먹은 듯 옆 유리창에 바싹 붙은 자세였지만, 그날 마술에 걸린 듯 무시무시하던 그의 드라이빙 스타일에 비춰 앞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프로토타입은 수퍼차저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섭게 몰아붙여도 롤링과 피칭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9월이 되자 크로스가 “기본 성격을 새로 정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시운전을 하고는 뒤쪽 승차감이 여전히 빡빡하다고 또 투덜댔다. 직선도로의 일반적인 성향에 비춰 적응형 댐퍼를 너무 다졌다는 말이었다. 댐퍼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손질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양산 부품인 배기관의 음질이 수제 프로토타입 부품보다 떨어졌다. 시원찮은 방귀소리만 잦아졌다. 손대지 않을 수 없었다. 으레 나오게 마련인 허점을 해결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방에서 일이 터진다니까.” 크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시판 몇 달 전에 주요 제원을 모두 확정 지어야 한다. 하지만 정밀 측정해야 할 소프트웨어가 남아있었다. 내겐 아무렇지 않았는데, 크로스는 트랙션 컨트롤의 잔소리가 심하다고 했다. 대시보드에 있는 대형 컬러 모니터도 말썽을 부렸다.
10월에 들어섰다. 우리는 차에 뛰어올랐다. 드디어 마음 놓고 만세를 부를 때가 됐다. 바람 소리도 싱그러웠다. 교차로에서 좌회전할 때 내가 방향지시등 소음을 지적했다. “재규어 같은 브랜드는 저런 시시한 건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래도 이전보다는 좋았다. 승차감도, 스티어링 성능, 사운드, 트랙션 컨트롤…크로스가 지적했던 수십 가지 장비들이 대체로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최종 시승에 나선 때는 시판 3개월 전. 이젠 거의 완성된 XK였다.
아직도 시판까지 3개월이 남았다고? 그렇다, XK는 지겹도록 장기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정보가, 때로는 명백한 오보가 감질나게 모여들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재규어 엔지니어들은 그런 차는 없다며 잡아떼기 작전을 폈다. 동시에 뭔가 대단한 게 있다고 암시하기 위해 온갖 제스처를 쓰면서 안달했다. 테스트 기간 동안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XK의 가능성을 믿는 엔지니어들은, 이 차의 면목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기간을 보냈다.
2004년 10월로 되돌아 가보자. 행운이 찾아왔다. XK 프로토타입이 구르기 시작한 다음날이었다. 영국 코벤트리 부근의 생울타리 뒤에 숨어있던 ‘카파라치’가 이중삼중으로 위장한 차 한 대를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사진을 확인하고는 재규어에 전화로 알렸다. 겉으로는 그런 차가 없다고 했지만, 말투는 그게 아니었다. “아니, 그럴 리 없어요.” “그래요? 이렇게 생겼는데.” 그러자 저쪽에서 한숨 비슷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전화를 끊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차라구요. 알겠어요?”
디자이너 이언 칼럼은 그래도 불안했던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몇 사람에게 실물을 보여줬다. 한두 달 뒤 재규어는 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무대는 디트로이트 모터쇼. ‘개선형 경량 컨셉트(Advanced Lightweight Concept)’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 때 그 차는 쇼카예요, 아시겠어요? 진짜 차가 아니라니까.” “천만에 그렇지 않았어요.” 자동차 메이커의 전형적인 속임수였다. 사실 범퍼와 트림을 바꿔 슬쩍 위장했지만, 디트로이트의 그 컨셉트카는 양산 모델이었다. 그걸 미리 알았다면, BMW 6시리즈나 벤츠 SL을 사려던 고객들은 다시 한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양산 모델이라고 발표할 리 없었다. 당시에도 구형 XK8을 사려는 고객들이 적지 않았다. 일단 재고분을 다 팔아 수입을 올려야 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처음으로 마이크 크로스와 함께 XK에 올랐다. 그런데도 공식적으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차여서 공개할 수 없었다. 정색을 하고 이런 거짓말을 하다니, 어처구니없었다. 다음에 크로스와 함께 XK를 탔을 때는 더 황당했다. 장소는 지난 6월의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 ‘미래의 차가 될 수도 있는’ 프로토타입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많은 위장막이 떨어져나가 버렸다. 심각해진 재규어 맨들은 잠깐 시범을 보인 뒤 XK를 곧장 트럭에 실었다. 아무도 가까이서 보지 못하게 하느라 서둘렀다. 그러고 9월에 다시 크로스와 시승할 기회가 있었다. XK는 다시 플라스틱 테이프로 몸을 감쌌다. “나는 굿우드 때 정도로만 위장을 하자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는구먼.” 크로스가 말했다. XK의 공식 사진이 유럽 전역의 신문과 잡지에 실리고 나서 이미 2주일이 지난 뒤였다. 그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렸다.
재규어는 XK를 개발하면서 잘 짜인 사기극과 연막전술을 폈다. 끝까지 내게 운전기회를 주지 않았다. 설령 내가 스티어링 휠을 잡았더라도 절대 정체를 밝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아마 가슴에 할말을 가득 담은 채 죽을 지경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몰래 시승을 하고 나서 그 사실을 밝혔다면, 그 뒤로 어느 메이커든 다시는 내게 새차 시승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동차 저널리즘에서 쫓겨나고, 재규어의 몇 사람도 해고되었을 것이다. 얌전해진 나는 마이크 크로스가 스티어링 반응과 핸들링, 그리고 브레이크가 어떻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듣고만 있었다.
기사&사진 제공 : 탑기어 2005년 12월호(http://www.topgearkorea.com )
운영자를 낚은 바로 그 글
시판을 꼭 3개월 앞두고 거의 완성된 재규어 XK가 마지막 테스트 준비를 마쳤다. 이번의 무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장차 가장 중요한 시장 중 한 곳이 될 광활한 신대륙을 야수와 함께 누볐다.

재규어 신형 XK는 명백한 스포츠카다. 그밖에 달리 부를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스포츠카다. 단순히 XJ의 스포츠 버전이 아니다. 느낌이, 사운드가, 회전과 달리기가 분명 XJ 방식과 다르다. 재규어가 바라는 바가 뚜렷이 드러난다. BMW 645Ci를 몰아보면 멋지다. 그런데 545i 투어링의 스티어링 휠을 잡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XK는 645Ci 수준의 안락성과 품격을 겨냥한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스포츠카의 근성도 굳게 지켜내려 한다. 포르쉐 911 기본형을 노려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지금 최신형 XK 프로토타입의 ‘조수석’에 앉아있다. 안타깝게도 운전석은 재규어 수석 개발 엔지니어인 마이크 크로스의 차지. 세상에서 XK를 가장 잘 알고, 이 차를 빚어내느라 온갖 술수를 총동원한 장본인이다.

운전석은 머지않아 모두에게 개방될 것이다. V8 엔진의 멋진 사운드가 계기판 너머 윈드실드를 통해 콕핏으로 들려온다. 액셀 페달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배기 사운드가 드세다. 큼직한 회전대와 드로틀이 토해내던 지난날의 포효가 가슴을 울린다. “미국식이 아니라 영국식 V8 사운드를 살리려고 한 거예요.” 크로스의 말이다. 6단 자동기어는 제대로 들어맞은 선택. 각 기어 단수 사이를 쏜살같이 오가며 고속과 저속 커브를 박차고 나갔다. 애스턴 마틴에서 느꼈던 V8 파워,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바삐 움직이는 트랜스미션이 그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려 든다. 크로스는 스티어링 휠에 달린 패들 시프트를 썼고, 기어박스는 빈틈없이 반응했다. 스포츠 오토 모드로 전환. 기막히게 돌아간다. 특히 코너 브레이킹을 위해 기어를 일찍 조작할 때 그랬다. 포인트를 알리기 위해 듬직하게 드로틀을 밟았다.

무게가 줄면서 스피드가 살아났다. XK는 BMW 6시리즈나 벤츠 SL보다 훨씬 가볍다. 수평대향 6기통 한 가지로 무장한 911보다 조금 무거울 뿐이다. 따라서 조향감이 뛰어나다. 심지어 저속 코너에도 쏜살같이 뛰어든다. 개발팀은 조향 감각과 자신감을 심기 위해 처음에 약한 언더스티어를 넣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언더스티어는 사라진다. 커브를 예리하게 빠져 나오자 주행안정장치 램프가 깜박였다. 그런데도 매끈하게, 살짝 파워 다운이 일어날 뿐이었다. 이런 도로에서도 그립은 선명하고 알찼다. 아주 까다로운 오르막 코너와 만나도 거침없었다. 노면을 억세게 거머쥐고 달려나갔다.
마이크 크로스는 스티어링 휠을 거칠게 몰아부쳤다. 살짝 건드려도 응답했고, 손가락 끝으로 휠을 놀려도 이상 없을 정도였다. BMW의 무거운 댐핑 휠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휠에서 손을 떼고도 우툴두툴한 도로를 날렵하게 미끄러져 나갔다. 앞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크로스가 말했다. “한계 감각이 끝내주는데요.” 조수석에 앉아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같은 도로에서 애스턴 마틴 밴티지 V8은 흡족하지 않더라고 대답했다. 그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제구실을 했다. 차체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으므로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재규어의 페달은 상당히 가볍다. 때문에 운전할 때 큰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

카브리오의 단단한 주행감각이 감탄을 자아냈다. 고속으로 달리다 한쪽 바퀴가 솟아오른 맨홀을 타고 넘었다. 앞바퀴에 이어 뒷바퀴까지…. 하지만 그런 뒤에도 차가 뒤틀리지 않았다. 많은 카브리오 라이벌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럴 땐 사실 쿠페가 한발 앞선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믿음직한 게 비싼 값을 한다.

공식 도로시험과 미국 내 홍보 기간은 아직 3개월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두가 기다려야 할 때 나는 이미 XK 안에 앉아있다. 거의 완성된 차가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의 신기하고도 황량한 풍경 속을 고속으로 달린다. 이 곳은 바로 아일랜드 출신 록밴드 U2가 그들의 걸작 앨범 표지를 찍었던 장소. 그 때 그들이 어디쯤 서 있었나 궁금했다. 하지만, 똑 같은 장면이 반복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게 돼버렸다.
XK도 여느 21세기 차와 다를 바 없다. 컴퓨터 디자인 과정을 통해 거의 완성된 모습으로 태어났다. 다만 컴퓨터 작업을 계속하면서, 실제 테스트를 병행해왔다. 개발 초기에는 XJ 세단 몇 대를 두들겨 XK 시험용 보디를 만들었다. 휠베이스를 잘라 XK에 맞췄고, 엔진 냉각용 공기의 흐름을 실험하기 위해 XK의 노즈를 달았다. 밸러스트(무게중심을 맞춰주는 추-편집자 주)를 이용해 XK의 무게 배분을 점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파워트레인과 서스펜션의 예비시험을 마쳤다. 일단 XK 프로토타입이 완성단계에 들어가자 기계상의 큰 변화는 하나밖에 없었다. 전체 기어비를 낮추는 것. 그렇지만 완성형 차체 개발 단계는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었다. 수천 가지 미세한 손질을 계속하면서 차를 다듬었다. 거기서 개성과 독특한 감각이 살아났다. 바로 유명한 ‘재규어 표준(Jaguarness)’이 태어난 것이다.
2005년 5월 중반에도 그 같은 손질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크로스와 함께 위장된 프로토타입을 탔을 때였다. 그가 좋아하는 영국 미들랜즈의 짧은 도로 구간을 달리고 있었다. 작업 목록은 제법 길었고, 그 중 상당수는 뻔한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승차감이 빗나갔다. 너무 터덜거리고, 너무 빡빡했다. 조수석에서도 재규어 표준이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엔진 사운드가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크로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확실한 보장을 원했다. 천천히 달릴 때 V8이 너무 시끄럽지 않을까? 요즘 소비자 여론조사에 따르면, 너무 시끄럽다고 여겨지는 차는 실격이다. 그래서 V8의 파이프를 좀더 뒤로 빼내야 했다. 크로스는 스티어링의 문제점도 찾아냈다. 커브에서 너무 기울어 민첩성이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사소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자동기어가 상큼하지 않고, 변속 때 뜸을 들였다. 노면 소음도 너무 컸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크로스는 “재규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시동 모터가 시끄러웠다. 실험에서는 좋았는데 방향지시등이 갑자기 ‘삑’ 소리를 내어 깜짝 놀랐다.

다음에는 지난 6월 굿우드에서 XK를 시승했다. 상세한 내용은 만화를 곁들여 <탑기어>에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크로스가 운전석에 앉고, 내가 윈도 밖을 내다보며 힐 클라임에 도전했다. 잔뜩 겁먹은 듯 옆 유리창에 바싹 붙은 자세였지만, 그날 마술에 걸린 듯 무시무시하던 그의 드라이빙 스타일에 비춰 앞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프로토타입은 수퍼차저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섭게 몰아붙여도 롤링과 피칭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9월이 되자 크로스가 “기본 성격을 새로 정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시운전을 하고는 뒤쪽 승차감이 여전히 빡빡하다고 또 투덜댔다. 직선도로의 일반적인 성향에 비춰 적응형 댐퍼를 너무 다졌다는 말이었다. 댐퍼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손질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양산 부품인 배기관의 음질이 수제 프로토타입 부품보다 떨어졌다. 시원찮은 방귀소리만 잦아졌다. 손대지 않을 수 없었다. 으레 나오게 마련인 허점을 해결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방에서 일이 터진다니까.” 크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시판 몇 달 전에 주요 제원을 모두 확정 지어야 한다. 하지만 정밀 측정해야 할 소프트웨어가 남아있었다. 내겐 아무렇지 않았는데, 크로스는 트랙션 컨트롤의 잔소리가 심하다고 했다. 대시보드에 있는 대형 컬러 모니터도 말썽을 부렸다.
10월에 들어섰다. 우리는 차에 뛰어올랐다. 드디어 마음 놓고 만세를 부를 때가 됐다. 바람 소리도 싱그러웠다. 교차로에서 좌회전할 때 내가 방향지시등 소음을 지적했다. “재규어 같은 브랜드는 저런 시시한 건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래도 이전보다는 좋았다. 승차감도, 스티어링 성능, 사운드, 트랙션 컨트롤…크로스가 지적했던 수십 가지 장비들이 대체로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최종 시승에 나선 때는 시판 3개월 전. 이젠 거의 완성된 XK였다.
아직도 시판까지 3개월이 남았다고? 그렇다, XK는 지겹도록 장기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정보가, 때로는 명백한 오보가 감질나게 모여들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재규어 엔지니어들은 그런 차는 없다며 잡아떼기 작전을 폈다. 동시에 뭔가 대단한 게 있다고 암시하기 위해 온갖 제스처를 쓰면서 안달했다. 테스트 기간 동안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XK의 가능성을 믿는 엔지니어들은, 이 차의 면목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기간을 보냈다.
2004년 10월로 되돌아 가보자. 행운이 찾아왔다. XK 프로토타입이 구르기 시작한 다음날이었다. 영국 코벤트리 부근의 생울타리 뒤에 숨어있던 ‘카파라치’가 이중삼중으로 위장한 차 한 대를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사진을 확인하고는 재규어에 전화로 알렸다. 겉으로는 그런 차가 없다고 했지만, 말투는 그게 아니었다. “아니, 그럴 리 없어요.” “그래요? 이렇게 생겼는데.” 그러자 저쪽에서 한숨 비슷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전화를 끊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차라구요. 알겠어요?”
디자이너 이언 칼럼은 그래도 불안했던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몇 사람에게 실물을 보여줬다. 한두 달 뒤 재규어는 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무대는 디트로이트 모터쇼. ‘개선형 경량 컨셉트(Advanced Lightweight Concept)’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 때 그 차는 쇼카예요, 아시겠어요? 진짜 차가 아니라니까.” “천만에 그렇지 않았어요.” 자동차 메이커의 전형적인 속임수였다. 사실 범퍼와 트림을 바꿔 슬쩍 위장했지만, 디트로이트의 그 컨셉트카는 양산 모델이었다. 그걸 미리 알았다면, BMW 6시리즈나 벤츠 SL을 사려던 고객들은 다시 한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양산 모델이라고 발표할 리 없었다. 당시에도 구형 XK8을 사려는 고객들이 적지 않았다. 일단 재고분을 다 팔아 수입을 올려야 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처음으로 마이크 크로스와 함께 XK에 올랐다. 그런데도 공식적으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차여서 공개할 수 없었다. 정색을 하고 이런 거짓말을 하다니, 어처구니없었다. 다음에 크로스와 함께 XK를 탔을 때는 더 황당했다. 장소는 지난 6월의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 ‘미래의 차가 될 수도 있는’ 프로토타입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많은 위장막이 떨어져나가 버렸다. 심각해진 재규어 맨들은 잠깐 시범을 보인 뒤 XK를 곧장 트럭에 실었다. 아무도 가까이서 보지 못하게 하느라 서둘렀다. 그러고 9월에 다시 크로스와 시승할 기회가 있었다. XK는 다시 플라스틱 테이프로 몸을 감쌌다. “나는 굿우드 때 정도로만 위장을 하자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는구먼.” 크로스가 말했다. XK의 공식 사진이 유럽 전역의 신문과 잡지에 실리고 나서 이미 2주일이 지난 뒤였다. 그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렸다.
재규어는 XK를 개발하면서 잘 짜인 사기극과 연막전술을 폈다. 끝까지 내게 운전기회를 주지 않았다. 설령 내가 스티어링 휠을 잡았더라도 절대 정체를 밝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아마 가슴에 할말을 가득 담은 채 죽을 지경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몰래 시승을 하고 나서 그 사실을 밝혔다면, 그 뒤로 어느 메이커든 다시는 내게 새차 시승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동차 저널리즘에서 쫓겨나고, 재규어의 몇 사람도 해고되었을 것이다. 얌전해진 나는 마이크 크로스가 스티어링 반응과 핸들링, 그리고 브레이크가 어떻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듣고만 있었다.
기사&사진 제공 : 탑기어 2005년 12월호(http://www.topgearkore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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