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스즈카"가 2018년부터 GT3 10시간 내구레이스로! 슈퍼GT 스즈카전은 별도일정으로 변경(오토 스포츠 웹)

 바로 어제입니다. 일본 미에현 스즈카시에 위치한 스즈카 서킷에서 열리던 스즈카 서킷 모터스포츠 팬 감사데이 기자회견 당시 나온 정보인데요. 스즈카 서킷의 운영주체인 모빌리티 랜드와 유럽의 대표적인 GT3 경주인 블랑팡 GT 시리즈의 오거나이저인 SRO간의 합동 기자회견에서 나온 건입니다.

 GT3, Group GT3는 양산되는 스포츠카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클래스로 2005년, 당시 FIA GT Championship의 주최자였던 SRO(Stéphane Ratel Organisation)에서 제안한 클래스입니다.

 시판 스포츠 카를 개조한 차량이 호몰로게이션 대상이 되며 2005년 당시에는 GT1, GT2 각 클래스와 포르셰 카레라 등 국내 원메이크 레이스 중간에 위치한 아마추어용 카테고리 설립을 지향했지만 상위 카테고리인 GT1이 소멸하고 GT2가 LMGTE로 개명한 결과 2012년부터는 FIA 타이틀이 들어간 GT 카테고리로는 유일하게 열리며 투어링카 및 그랜드 투어링카 레이스를 통틀어 최상위에 위치하는 경주가 바로 이 클래스입니다.

 다만
아마추어용으로 머신 고비용화 등을 충분히 배려한 당초 규제 현재도 그 성격을 다분히 남기고 있으며, 특히 밸런스 오브 퍼포먼스(BOP)로 불리는 독자적인 경주차량 성능 조정 시스템은 이 그룹 GT3조절 최대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FIA GT3 European championship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클래스는 이후 세력을 넓혀나가 현재는 유럽, 일본, 미국 등지에서 열리는 대표적인 자동차 경주로 자리매김 했으며 국내에서도 GT Asia 경주를 통해 이 클래스의 차량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사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이미 일본 모터스포츠계에도 GT3 경주차들이 달리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이미 GT3 경주차들이 대세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가격도 확실히 싼데다 지난 2011년 슈퍼GT에서 BMW의 GT3 경주차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GT3 경주차들이 늘어난데다 2012년부터는 GT3 경주차들은 SRO의 BOP를 그대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가격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GT3 경주차 신차를 구매하는 비용은 새로 경주차를 만드는 것 대비, 3~40%밖에 안되는 수준입니다. 일본 기준 JAF-GT에 해당하는 경주차 하나를 만드는데 1억엔이 든다고 하면 GT3 경주차는 3~4천만엔 수준이라 참전 비용도 덜 들어가죠. 2012년 한 팀에서는 참전비용에 대해 이야기 하길 경주차를 빼고도 6천만엔이면 충분하다고 했으니 레이싱 팀으로서는 파츠만 많이 준비해 두면 장땡(?)인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세계적으로 GT 레이스 하면 당연히 이 GT3을 언급하고 있고 말이죠.

 이번 모빌리티 랜드와 SRO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이 대회는 전통적으로 스포츠카 레이스로 많이 열렸던 스즈카 1000km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47회라는 횟수를 이어나갑니다. 실제로 스즈카 1000km의 경우 2006년부터 현재까지 슈퍼 GT의 라운드로 열리지만 그 이전에는 프로토타입 스포츠카 경주, GT 스포츠카 경주, GT 및 투어링카 혼주 레이스 등으로 치뤄진 적이 있던 대회입니다. 

 기사를 보면 참가 차량은 다양할텐데요. Blancpain GT Seires, Pirelli World Challenge, IMSA GTD 등의 경주에 참가하는 GT3 경주차들은 모두 모일 겁니다. 그만큼 목표로 하게 될 GT3 경주차의 천하통일 대전이라는 캐치 프라이즈에도 어울릴거 같습니다. 그리고 10시간인 만큼 보는 이들의 손도 떨릴거고 말입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슈퍼 GT는 괜찮을까 모르겠습니다. 현재까지 스즈카 전은 이 스즈카 1000km으로 떼워먹었는데, 갑자기 새로운 대회가 열리면 슈퍼 GT는 스즈카에서 철수해야 할 판일텐데, 이에 대해서는 GTA와 모빌리티 랜드가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지금 9월 초로 계속 잡혀가는 슈퍼 다이큐 후지전을 걱정해봐도 할말이 없는데, 저거 치르고 나면 1주일 뒤에 바로 슈퍼다이큐 후지전이 잡히는지라.......[각주:1] 드라이버들의 체력이 문제겠죠?



(참고 : 다음에 스즈카가 없어서 임시로 인근 시즈오카로 했습니다. ㅠㅠ)


  1. 최근 몇년간 스즈카 1000km 1주 뒤에 후지9시간이 열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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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phia

A8, 아우디가 잘 나가는 이유를 보여 주는 차

프리미엄 브랜드를 이야기할 때 우선 거론되는 것은 성능이다. 성능은 기계적인 것이다. 기계적인 우위성을 바탕으로 하는 주행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BMW는 ‘다이나믹’이고 메르세데스 벤츠는 ‘기품’이다. 영국의 재규어는 ‘그랜드투어러’를 DNA로 하고 있으며 후발 주자인 렉서스는 독일식 기계주의 대신 ‘친환경’을 내 세우고 있다.

글/채영석(글로벌오토뉴스 국장)

아우디는 ‘Everyday Sports’다. 아우디는 ‘기술을 통한 진보’, ‘진보하는 성능’을 캐치 프레이즈로 하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은 엘레강스다. 누구나 다룰 수 있는 스포츠 세단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21세기는 흔히 말하는 ‘달리는 즐거움’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단단한 하체와 폭발적인 성능을 기반으로 만들어 낸 주행성만으로는 브랜드의 우위성을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뭔가 달라야 한다. 그것도 시대를 리드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공상영화의 수준까지는 아니다. 현실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구점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제품은 만들 수 있지만 브랜드로 키우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그런 점에서 더 어렵다. 선대 모델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최근 등장한 라이벌들보다 분명히 한 수 위에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S도 그랬고 7도 그랬듯이 A8은 목적달성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차가 가장 좋다.’는 논리에 부합한다는 얘기이다. 특히 독일 빅3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좋은 점은 받아 들여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하는 자세를 보이며 발전하고 있다.

아우디 A8은 라이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우디 A8의 뿌리는 1988년 등장한 V8이다. 당시 콰트로 4륜 구동 시스템을 채용해 아우디의 플래그십으로 등장했던 V8은 어퍼 미들 클래스 세그먼트였다. 이것이 아우디의 본격적인 행보의 시작이었다.

좀 더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1994년 차명을 A8로 바꾸고 등장한 2세대부터였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프레스티지카로서의 행보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 행보의 전면에 드러난 것은 ‘디자인’이었다. 보수적이고 정통성을 강조하는 라이벌에 비해 아우디는 ‘우아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새로운 감각으로 소비자에게 다가섰다.

2002년 가을 파리살롱을 통해 데뷔한 3세대 A8은 그런 아우디의 ‘진보하는 성능’을 바탕으로 ‘엘레강스한 디자인’을 조합하며 아우디의 성장을 견인했다.

A8이 속한 세그먼트에서는 일반 양산 브랜드와는 다른 트렌드가 존재한다. 지겹도록 들어야 하는 ‘어려운 경제’ 속에서도 판매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에도 가장 먼저 성장세를 회복한 것이 아우디를 비롯한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들이다. 그 중에서도 A8를 비롯한 유럽 기준 E2세그먼트(또는 L세그먼트라고도 한다.) 모델들은 부침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 그것은 소비자들의 소득 증대로 인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20 대 80의 논리가 등장하며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선진국 개도국을 불문하고 부자들이 증가하면서 ‘남들과는 다른’ 프리미엄 브랜드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2010년 9월 아우디의 글로벌 판매실적은 10만 2,650대로 전년 같은 달 대비 16% 증가했다. 2010년 1월부터 9월까지 누계 판매대수는 17.6% 역시 두 자리수 증가율을 보이며 82만 9,300대를 기록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천재지변이 아닌 한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우디는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행사 G20을 겨냥한 공식 의전차에 G20 로고를 새겨 넣었다. 다른 의전차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런 스페셜 에디션을 만들 정도로 각 시장의 부자들에 대해 구체적이고 철저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한국시장에 대한 아우디의 ‘애정(?)’을 가늠케 하는 내용이다. A8은 특히 차만들기의 내용에서 아시아 시장의 쇼파 드리븐 오너들을 의식한 부분들이 많다. 호화롭고 사치의 극에 달한다. 이 시장의 오너들은 ‘저렴한 차’보다는 나만의 프레스티지를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더 중시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비싼 차’를 찾기도 한다.

아우디 뉴 A8은 요즘 아우디 브랜드의 판매가 상종가를 치고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시대의 하이엔드 수요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과의 교감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A8은 그런 점을 잘 읽어 내고 있다. 그것을 높은 수준의 차만들기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 메커니즘의 성능이다. 그래서 ‘진보하는 성능’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아우디 4세대 A8 4.2FSI 시승기 중에서)




일단 요즘 운영자가 블로그 관리를 안 했다는 것은 되게 죄송합니다. orz

글 : 글로벌 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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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지금의 현기차에게 저게 먹힐지 의문입니다만, 앞으로 현기차가 나아갈 길을 짚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Toyota의 리콜 문제가 심각한데 현기차도 이에 대응해야 하고 말이죠. 그리고 거 수동변속기 차 좀 확대도 시키고, 옵션 장난도 치지 말란 말이다. ㄱ-



그리고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사 : 글로벌 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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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오토뉴스의 분석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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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무 저작권 법. ㄱ-)

닛산의 자신만만함이 어디까지 갈지는 두고봐야 하지만 닛산이 자신 있기는 있나봅니다.

글 : 글로벌 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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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브랜드의 이미지 리더 제네시스

토요타의 렉서스 전략을 벤치마킹해 시도된 현대의 BH 프로젝트. 그리고 그 산물인 제네시스. 에쿠스 출시 이전 현대의 최고가 모델이자 후륜구동 차량이며 미국 시장에서 제 값받고 팔자라는 취지로 개발된 제네시스. 과연 성공적 전략인가?

▷이 강의는 2009년 2월 5일자입니다.(방송시간 10분)
▷아래 PPT이미지를 통해 칼럼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본 강의는 글로벌 오토뉴스의 채영석 국장이 한국경제신문사의 온라인 경영교육 사이트인 HiCEO에 제공하고 있는 강의로 HiCEO 측과의 관계로 인해 시차가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1차 출처 : HiCEO
2차 출처 : 글로벌 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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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 처음으로 프린스 자동차(1966년 닛산에 합병)에서 등장한 스카이라인. 이 가운데 최강의 이름으로 불렸던 스카이라인 GT-R. 그 최신 모델이자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슈퍼 스포츠카인 R35 GT-R이 2009년 7월, 드디어 한국에 온다. 본 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스카이라인 GT-R의 형뻘이라 할 수 있는 S54형 스카이라인 GT부터 시작해 스카이라인 GT-R 및 신형 GT-R, 그리고 1973년 이후 1989년까지 나타났던 최고의 모델들을 한번 다뤄보고자 한다.


0장. 전설의 시작.(1952~1966)
스카이라인의 시작은 1952년에 생긴 프린스자동차(プリンス自動車)에서 처음으로 탄생했다. 프린스 자동차는 본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구 일본 해군[각주:1]에 비행기를 납품하던 타치카와 비행기 제작소의 직원 중 소토야마 타모츠를 필두로 한 기술자들이 연구를 시작해서 1947년에 분리한 도쿄전기자동차 회사(東京電気自動車会社)를 모태로 하고 있다.[각주:2] 이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특수소요 때문에 배터리 값이 오르게 되자 전기자동차의 경쟁력은 떨어졌고 결국 이 회사는 가솔린 엔진 차량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 11월, 가솔린 엔진 차량을 만들기 위해 후지정밀공업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당시 이 회사의 직원이던 나카가와 요이치(中川良一)는 할 수 있다고 한 다음 바로 제작에 돌입했다.

 
당시 타마 전기자동차가 만들었던 전기차. 타마전기자동차는 도쿄전기자동차가 그 근거지를 타마시로 옮기면서 나온 이름이다.


1952년에 이 회사가 출시한 차량이 바로 프린스. 당시 태자가 된 현 일왕 아키히토를 기리기 위해 만든 차량이었다. 이해에 93대를 팔았으나 도요타가 맹렬히 추격했다. 도요타는 이미 1930년대부터 자동차를 만들어왔었고, 전후 특수로 인해 회복된 후 1955년, 사실상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첫 번째 국산차 크라운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이에 자극받은 당시의 후지정밀공업[각주:3]으로서는 2년 후인 1957년 4월, 직렬 4기통에 총 배기량 1,484cc인 GA30 엔진을 얹은 스카이라인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1957년에 출시된 ALSI형 스카이라인. 스카이라인 시리즈의 첫 모델이다.

출시와 동시에 프린스 자동차로 이름을 바꾼 후인 1963년, 메이신 고속국도의 개통과 함께 열린 제 1회 일본 그랑프리. 당시의 경주는 국내 시판 차량들끼리만 참가하는 자동차 경주였는데 이 당시 프린스 자동차에서는 1957년에 출시된 스카이라인의 후계 타자인 스카이라인 GT를 투입해 기술력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한 것. 당시 자동차 공업회에 속해있던 참가 업체들은 차량을 양산차 그대로 내놓자고 했으나, 정작 다른 업체들은 개조해 참전, 프린스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꼴찌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회사는 감량 생산에 돌입, 직원진들은 회장에게 질책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판매량 급감 등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각주:4]

결국 1963년 6월, 당시의 개발진 중 리더였던 나카가와는 ‘제 2회 그랑프리에서 설욕한다.(원어 : 次のグランプリで雪辱する。)’는 선언을 했고 당시의 자동차 설계 담당자였던 사쿠라이 신이치로(櫻井眞一郎) 및 젊은 사원들이 나카가와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

“마력을 올리기 위해 큰 엔진을 실고 싶습니다. 보디를 20cm 늘립시다.(원어 : 馬力アップのため大きなエンジンを乗せたい。ボディーを20センチ延そう)”

라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분명한 점은 당시 스카이라인은 직렬 4기통 엔진을 얹은 후륜구동 차량이었다. 이런 차량에 이보다 큰 엔진을 얹자는 것은 모두들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설계를 변경하는 것은 차량 개발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지만 개발진 모두는 위기감 때문에 뭐라고 할 형편은 아니었다.

당시 외국 자동차 수입 자유화가 1년 앞으로 다가오던 차에 일본 통산성 주도로 자동차 합병 계획이 흘러나오고 있던 만큼 작은 회사였던 프린스 자동차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기술력을 인정받아 통산성의 합병 계획 속에서도 자존심만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것은 당시 나카가와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레이스에서 이기지 않으면 작은 회사인 우리는 위험하다.(원어 : レースーで勝たなければ小さなうちは危い。)’

이에 맞춰 개시된 개발에 사쿠라이 신이치로는 보디를 절단할 것을 개시, 보디를 절단해서 새로운 보디를 만들기 시작했고 엔진 설계를 맡은 사카키바라 유지(榊原雄二)는 한가지 목표를 정했다. 그것은 엔진의 출력을 96ps(71kW)에서 150ps(110kW)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속회전이 가능하게 하는 오버헤드 캠샤프트 방식(OHC)을 채용했으나 부족한 출력이 고민되었던 상황에 나카가와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것은 바로…….

“엔진에 기화기(카뷰레터)를 1개에서 3개로 늘리면 마력이 나온다.”

라는 것. 여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 사카기바라로서는 나카가와가 존경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약 3개월 후. 3개의 기화기를 얹은 G-7 엔진이 완성되었다.

 
프린스자동차가 개발한 G7 엔진.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나온 엔진의 R380에 쓰인 GR8엔진이다.

개발진 모두가 그 엔진을 쓰자고 제안했고, 점화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원래 점화식은 비행기를 만들던 시절에 처음으로 엔진을 가동할 때 했던 의식이었고 그 신관(우리나라로 치면 제관)은 엔진 개발을 맡은 사카기바라 유지가 맡았다.[각주:5] 제주를 따른 후 기도를 했고 여기서 이어진 엔진 점화는 대성공. 150마력을 돌파해 충분히 최고시속 180km을 낼 것이라고 자부했다. 1964년 3월, 제 2회 일본그랑프리를 2달 앞두고 드디어 스카이라인 GT가 출시되었다. S54형 스카이라인 GT가 나온 것이다.

 

이후 어떤 한 직원의 아이디어로 스즈카 서킷에서 테스트가 이루어 졌는데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당시 드라이버인 스나코 요시카즈(砂子義一)는 스카이라인 GT의 성능에 크게 만족했던 것이다.[각주:6] 또한 당시 그는 이 차의 스피드에 크게 놀랐는데 스즈카를 한바퀴 도는데 당시 일본차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3분을 끊었던 것. 당사자인 스나코 뿐 아니라 모두가 승리를 확신했던 것이다.

1964년 5월 3일, 스즈카 서킷(鈴鹿サーキット)
제 2회 일본 그랑프리가 열리던 그 해. 프린스자동차로서는 전년도의 참패를 설욕할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프린스로서는 또 다른 적을 상대해야 했으니 그것이 바로 포르쉐 904(Carrera GTS). 개인 드라이버가 수입해서 급하게 참전이 결정된 차량이었다.

 
독일 포르쉐의 904(사진은 904/6)

수입한 드라이버는 시키바 소우키치(式場壮吉, しきばそうきち),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는 일본 모터스포츠 초창기에 활동했던 드라이버였다. 일설에 의하면 포르쉐 904의 출장은 도요타에서 자금을 지원해 차를 준비하고 이것을 시키바 개인 출장으로 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는데 이는 당시 프린스 스카이라인 GT의 평판이 높은데다가 성능도 차원이 다른지라 이를 눈치챈 도요타가 코로나의 우승은 불가능하더라도 이 차를 투입시켜서 스카이라인 GT의 우승을 저지하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예선에 뛰어든 포르쉐 904의 성능은 압도적이었지만 예선 당시의 사고로 인해 차체는 대파, 급하게 나고야로 이동해 차량의 수리를 진행해 결승전에 어렵게 도착했다. 하지만 역시나 포르쉐는 포르쉐인지라 결승 당시에도 모두가 놀란 것은 여전했다. 당시 사쿠라이 신이치로는 훗날 NHK의 교양프로그램인 프로젝트 X~도전자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생각해도 괴물이었죠. 어땠든 자동차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당시 스나코 요시카즈를 비롯한 7명의 드라이버가 각 1대의 스카이라인 GT를 잡았으며 그 최고속도는 180km. 이 속도로 당시의 경쟁차인 도요타 코로나나 닛산 블루버드, 마쯔다 캐롤 등을 손쉽게 제압했지만 역시나 상대였던 포르쉐는 강적이었다.

그런데 6바퀴를 돌던 도중, 포르쉐 904가 한 바퀴 뒤쳐진 여성 레이서의 차를 추월하려고 멈칫 거리던 순간 뒤에 있던 이쿠자와 테츠(生沢徹)가 탄 스카이라인 GT가 추월했으나 1바퀴만에 다시 추월 당했고 그 이후 프린스 스카이라인 GT가 추월할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당시 이것을 놓고 일부에서는 무슨 담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사람도 존재했다. 당시 이쿠자와와 시키바는 친구 사이였고 레이스가 있기 전에 이쿠자와가 시키바에게 ‘만일 빠진다면 1바퀴만이라도 앞에서 달리게 해주면 좋겠다.(원어 : もし抜けたら1周だけは前を走らせてほしい)’라는 이야기를 경주 전에 했다고 하지만 두 사람간의 말은 농담이라고 볼 수도 있기에 진실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당시 스카이라인 GT란 차종은 분명히 실제로 팔리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레이스용으로 쓰인 엔진과 일반 양산용으로 쓰인 엔진은 차이가 있는데 양산용 스카이라인 GT에 쓰인 G7 엔진은 당시 같이 팔렸던 제 2세대 글로리아의 모델 중 하나인 글로리아 슈퍼 6 S41D-1형[グロリア・スーパー6 (S41D-1型)]에 얹힌 엔진으로 당시 최고출력은 105ps(카뷰레터가 1개 있던 엔진), 125ps(3개의 카뷰레터가 있던 엔진)이었으며 레이싱용 스카이라인 GT에 쓰인 엔진은 G7B-R형이라고 불리는 레이싱용 엔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65년, 일본 그랑프리는 사정상 취소되었으나 프린스로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1965년 5월의 어느 한 날이었다.

“우리는 닛산에 흡수합병된다.(うちは日産に吸収合併為れる)”

외제차에 대항하기 위해 통산대신[각주:7]이 움직여서 결정한 것이었다. 경악할 수 밖에 없던 모두들이지만 할 말은 없었다. 나카가와 자신도 전날 밤에야 들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던 것.

합병 일자는 1966년 8월 1일. 결과적으로 1966년 그랑프리가 마지막인 것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타도 포르쉐’였고 이를 위한 레이싱카 개발이 시작되었다. 당시 포르쉐 904의 엔진 출력이 180ps였던 만큼 그들의 목표는 최고출력을 180ps 이상으로 올리는 것. 항공기 기술자 출신이었던 그들인만큼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때 엔진에서는 G7엔진을 근간으로 해서 개량의 폭이 컸는데 먼저 엔진의 밸브형식을 기존의 SOHC에서 DOHC로 교체했다. 여기에 고속으로 급커브를 할 시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 윤활유를 공급하는 Scavenging 펌프를 채용했던 것이다.

드디어 완성된 엔진은 G7B-R을 근간으로 해 DOHC 방식을 채용한 엔진으로 당시 수치는 225ps(단 실전에서는 200ps로 축소). 그러나 다른 하나의 문제는 차의 총 중량이었다. 당시 포르쉐 904의 총 중량은 700kg도 안 되었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에 대한 그들의 해답은 경량화였다.

경량화를 위한 조건으로 내건 것이 차체 소재의 교체, 기존의 강철에서 알루미늄 보디로 바꾸고 연료탱크 재질 역시 교체, 경량화를 노렸으나 일본차에 알루미늄 보디 사용은 전무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한 베테랑 용접공은 자신이 비행기를 손 볼 당시 매일 했던 일이라고 하면서 도전했던 것이다. 용접결과는 상당한 성공, 이렇게 해서 완성된 차량이 바로 프린스 최후의 경주용 레이싱카인 R380인 셈이다.

 

그런데 프린스로서는 다시 한 번 골머리를 앓을 판이었다. 하필이면 포르쉐 904 그 이상의 성능을 지닌 포르쉐 906(통칭 카레라 S)이 참전한다는 소식이 나온 것이다. 이에 그들은 연료공급 및 타이어 교체 연습을 하면서 마지막 결전에 대비하게 된다.


1966년 5월 3일, 2회까지는 스즈카였지만 이번에는 장소를 바꿔 후지 스피드웨이(富士スピードウェイ)에서 제 3회 일본 그랑프리 결승전(第3回 日本グランプリ 決勝戦)이 열렸다. 이날이 바로 프린스 모터스 최후의 결전일이 된 날로 이날 경기에는 당대의 스포츠카들이 모두 출장했었다. 재규어, 로터스, 포드 등의 당대 유명 메이커 뿐만 아니라 전년도 우승자인 포르쉐 역시 참전했다. 오후 2시 35분, 후지 스피드웨이의 구간을 60바퀴나 질주하는 경기가 시작되었다. 당시의 후지 스피드 웨이는 현재와는 다른 코스였다.

 
파란색 : 현재 사용 중인 구간, 녹색 : 1974~1984년 당시 사용, 붉은색 : 1974년 이전 사용구간

당시 길이 4km의 고속 구간이던 이곳에서 경기는 초반부터 R380이 초반부터 선두로 올라섰지만 20바퀴를 넘어가면서 포르쉐 906이 거리를 좁혀왔고 24바퀴째에 추월당했다. 이때부터 경기 상황은 1964년과 같아지나 싶었지만 드라이버인 스나코 요시카즈로서는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애시당초 실력이 비슷하다면 나머지는 팀의 능력에 모든 것이 걸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회 그랑프리 이후 계속 닛산팀의 감독으로 참가한 아오지 야쓰오(青地康雄)로서는 이 경주의 승패는 급유에 있다고 생각, R380이 급유하러 들어온 36바퀴째에 비밀 병기를 꺼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그때는 사실상 거의 보기 드문 방식이었는데 이것을 프린스에서 처음 생각하고 만든 사람은 차량 설계팀 소속이던 카키시마 미츠오(柿島道雄)인데 방식은 간단했다. 연료통을 높은 곳에 둔 다음 연료가 흘러 내리는 속도에 가속을 붙여서 연료를 빨리 넣는 것. 그 결과 급유 시간은 단 15초, 31바퀴를 돌던 포르쉐 906이 급유하는데 거의 1분을 소비한 것 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35초의 시간을 번 프린스로서는 전력 질주를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때 270km을 돌파, 게다가 47바퀴때 포르쉐 906이 스핀하면서 가드레일에 충돌해 리타이어했고 이 이후의 결과는 프린스의 독주체제가 진행, 도요타나 닛산 같은 경쟁 차와는 3바퀴나 벌리면서 경기를 리드했다. 결국 경기 시작 2시간 9분 만인 오후 4시 44분, 프린스 R380이 1위로 들어오면서 8월 1일을 근 3달 앞두고 벌인 마지막 레이스에서 회사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1966년 8월 1일.
프린스 자동차는 닛산에 흡수합병되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프린스의 직원들로서는 향후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들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도 잠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닛산의 과장급 직원들로부터 의외의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기술을 전수해 달라는 것.
이유는 간단했다. 프린스가 이미 일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술을 닛산으로서는 원했던 것. 사쿠라이 신이치로를 비롯한 구 프린스 직원들은 개발의 최전선에 섰고, 특히 사쿠라이 신이치로가 설계하고 닛산 브랜드 하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C10형 스카이라인은 최초의 GT-R이 등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 영문 및 일문 위키페디아, NHK 프로젝트 X 도전자들(プロジェクトX〜挑戦者たち〜) 제 151화 [라스트 파이트! 명차여 영원하라!][각주:8] 영상.
  1. 현재의 해상자위대와는 전적으로 다른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이다. 뭐, 문제는 해상자위대 창설 당시 그 구성원들이 구 일본해군 인사들이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2. 단, 1947년 6월, 근거지를 타마시(多摩市)로 옮김. [본문으로]
  3. 타마전기자동차(たま電気自動車)와 후지정밀공업이 합병함. [본문으로]
  4. 예나 지금이나 양산차를 경주로 한 레이스는 판매량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 때 1위는 도요타 코로나였다. [본문으로]
  5. 우리나라로 보면 고사를 지내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본은 다신교 국가지만 그 안에 신토가 있는지라 당시 기록을 보면 아마도 신토 형식으로 지냈을 것이라 판단된다. [본문으로]
  6. 참고로 당시 도쿄에서 미에현 스즈카까지는 총 430km. 당시의 도로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1회 가는데 10시간이었으며 레이스차에 전 개발진이 탑승, 그러나 난방장치가 없었기에 당시 직원들은 상당히 추운 길을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지금은 경제산업성으로 이름이 바뀐 옛 통산성의 총 책임자. 우리나라로 치면 산업자원부 장관이나 외교통상부 장관 정도 된다. 당시의 통산대신은 사쿠라우치 요시오(櫻内義雄, 1912년 5월 8일~2003년 7월 5일)이었다. [본문으로]
  8. 第151回 「ラスト ファイト 名車よ 永遠なれ」(スカイラインGT(S54A-I型)およびR380・プリンス自動車) 2004년 9월 7일 NHK 방송.진행은 쿠니이 마사히코(国井雅比古) 및 젠바 타카코(膳場貴子), 게스트는 아오지 야쓰오 및 사쿠라이 신이치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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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phia
전통적으로 BMW의 M 파워 엔진은 자연흡기였다. 최초의 M1부터 30년이 넘게 BMW의 M 디비전은 고회전까지 날카롭게 치솟는 자연흡기 엔진을 고수해 왔다. 고회전 자연흡기는 M 디비전의 가장 큰 아이덴티티였고 많은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BMW는 M 모델뿐만 아니라 전 라인업에 걸쳐 자연흡기로 승부해 왔다.

글 / 한상기 (프리랜서 자동차 칼럼니스트)

직렬 6기통 3리터 엔진이 대표적인 예로, 타 메이커들이 3.2~3.6리터로 배기량을 올리거나 과급을 사용할 때도 자연흡기로 대등한 성능을 뽑아냈다. 자연흡기 엔진이야말로 BMW의 성격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였다. .

하지만 3리터를 시작으로 V8과 V12까지 트윈 터보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연비와 CO2 규제이다. 자연흡기로서는 성능을 올리면서도 배기가스를 줄이는 것이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자동차 메이커들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로, 요즘은 출력과 연비가 동시에 좋아지지 않으면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시대이다. 환경 규제와는 별도로 성능에 대한 눈높이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여러 번 밝힌 것처럼 BMW와 벤츠는 유럽의 평균 CO2 규정에 가장 불리한 입장이다. 연비가 나쁜 고급차를 주로 만들고 아우디처럼 폭스바겐이라는 우산도 없다. 그렇다고 고성능 모델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이유가 M 트윈 터보가 개발된 배경이다.

X5 M과 X6 M의 4.4리터 V8 트윈 터보는 현존하는 최신 기술이 망라돼 있다. 이 엔진은 차기 M5와 M6에도 그대로 올라갈 전망. 작년 초만 해도 차기 M5는 V10 트윈 터보가 올라갈 것이라는 소문도 많았지만 과감하게 V8으로 다운사이징했다. 실린더 수가 줄었지만 진보된 트윈 터보 덕분에 당초 기대했던 만큼의 출력을 얻어 냈다.

트윈 터보 시스템은 반응이 빠른 트윈스크롤 타입이다. 거기다 직분사까지 추가돼 전 영역에 걸쳐 고른 힘을 발휘한다. 555마력의 힘은 5,750~6천 rpm 사이에서 발휘되고 69.3kg.m의 최대 토크는 단 1,500 rpm에서 시작돼 5,650 rpm까지 지속된다. 토크 밴드만 본다면 어지간한 최신 디젤을 능가한다. 따라서 엔진의 특성도 기존의 고회전 자연흡기와 차이가 발생한다.

일반 4.4리터 트윈 터보처럼 배기 매니폴드는 뱅크 안에 위치해 그만큼 컴팩트하게 만들었다는 뜻도 된다. 냉간 상태에서도 터보의 빠른 작동을 위해 배기 매니폴드의 길이도 줄였다. 터빈의 부스트는 1.5바로 높아졌고, 트윈스크롤 트윈 터보는 역류하는 압력을 줄여줌과 동시에 반응성을 향상시켜준다.

CCM(Cylinder-bank Comprehensive Manifold)은 BMW의 특허로 등록된 기술이다. CCM은 동일한 배기 매니폴드로 각 터보가 양쪽 뱅크에 연결된 타입으로 하나의 터빈이 하나의 뱅크에서만 배기가스를 공급받는 일반 트윈 터보와 구조가 다르다. 따라서 각 터보는 일정한 간격으로 부스트가 이뤄져 빠른 반응과 함께 넓은 토크 밴드가 가능하다. 이 V8 트윈 터보는 파워와 스포츠, 이피션시 모드에 따라 엔진 사운드도 달라진다.

트윈 터보를 적용해 얻은 장점은 단순히 높은 출력이나 넓은 토크 밴드가 아니다. 연비와 CO2 배출량에 있어서도 분명한 메리트를 제공한다. X5 M과 X6 M의 연비와 CO2 배출량은 8.62km/L, 325g/km. 이는 V10 엔진의 M5(8.07km/L, 357g/km) 보다 좋다. 두 모델이 현 M5 보다 500kg 이상 무거운 것을 감안하면 두드러진 개선이다. 유로 5와 미국 LEV II 배기가스 기준을 만족하는 것은 물론이다.

타협은 보통 부정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다. 그래서 메이커들은 타협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즐겨 쓴다. 어느 한 부분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다른 장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자연흡기를 포기하고 터보를 택한 BMW의 타협은 골수 M 마니아들도 십분 이해할 만한 성격이다. 특별히 자연흡기 특유의 감각에 목매지 않는다면 출력과 연비 모두 좋아진 것에 만족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올리고 보니 느끼는 생각.

- BMW 관련 칼럼기사 진짜 오랜만에 공개한다. 이런 된장. ㄱ-


기사&사진 : 글로벌 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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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phia

대정봉환이 뭐냐고요? 일본사에서 메이지 유신의 끝을 알리는 일대사건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 및 무가 정치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뭐, 박상원씨가 이렇게 적은 것에도 다 이유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효, 읽어보세요.

大政奉還 (타이세이호칸) – 豊田(도요타)家門의 歸還

1. 서두: 한 닛산맨의 ‘예언’
1990년대 말, 경영난으로 프랑스의 르노자동차(Renault S.A.)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일본 3대 자동차 회사 중 하나인 닛산(日産)은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외국인을 사장으로 맞이하면서 대대적인 경영수술에 들어갔다. 당시 NRP(Nissan Revival Plan)이라는 계획으로 경영정상화를 추친해 나가던 닛산의 한 관계자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논조의 말을 했었다. ‘우리[닛산]은 이제 대기업병을 고치고 있지만, 토요타는 훗날 그들의 대기업병을 고쳐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때 ‘닛산맨’의 발언은 오늘의 토요타를 제대로 내다본 것인지도 모른다.

글/박상원(자동차 칼럼니스트)

2. 도요타 가문의 대정봉환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끝[각주:1]으로 도쿠가와 막부[각주:2]가 300여년간 통치하면서 쇄국정책을 펼쳤으나 19세기말 일본 해안 곳곳에서 개방을 요구하는 서방 군함들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와중인 1867년 몇몇 지방 군주들은 천황 –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일왕으로 하지만 기사상 천황으로 한다 – 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을 주장, 도쿠가와 막부에게 왕정복귀를 요구하였다. 세력이 약화된 막부는 이에 굴복, 천황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해체되었으며 결과적으로 675년간 일본을 지배한 막부 정치체제를 붕괴시킨 본 사건을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고 일컫는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지난 2009년 1월20일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토요타 자동차에서 발생했다.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의 손자인 도요타 아키오 부사장이 3명의 다른 부사장들을 물리치고 차기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14년만에 도요타 가문이 경영권을 다시 획득한 것이다. 미국 비지니스위크(Business Week)의 한 기자는 현재의 험난한 경영환경 – 토요타의 경우 2008년 하반기 미국시장에서의 판매량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최대 30% 이상 급감한 상태였다 – 중에 왜 경영진 교체가 이루어 졌는지 의아해 했지만 10년 전 닛산 관계자의 발언을 되새겨 보면 토요타에게 지금이야말로 경영혁신의 적기일지도 모른다.

1937년 이후 토요타 자동차에서 사장으로 재임한 사람들은 총 10명으로 이중 5명이 창업가문인 도요타 출신이었다. 1985년 당시 사장이었던 도요타 타쓰로가 심장병으로 입원하면서 도요타 가문 중에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없자 30년만에 처음으로 비(非) 도요타 가문 출신의 경영자를 앉히게 된다. 바로 그가 오쿠다 히로시였다. 오쿠다 사장은 토요타 자회사들을 적대적 인수하려던 외부세력에 대해 성공적으로 대처하였고, 이와 같은 전문 경영인의 성공은 도요타 가문이라고 해서 사장으로 대표되는 경영권을 물려줬던 과거의 전통을 끝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오쿠다 사장 이후로 2명의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맞았던 토요타에게 심상찮은 조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선 1990년대 말부터 미국 시장에서 토요타 자동차들의 일부 차종의 고장률이 높아져 소비자들의 불평이 높아져만 갔고 언론에게까지 보도되는 사례가 발생했다. 미국시장에서 품질의 토요타라는 오래된 브랜드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오랫동안 토요타라면 거의 모든 차종에 추천 (recommended)를 부여하던 대표적 소비자 전문지인 Consumer Reports가 2007년 평가에서 토요타의 대표 차종인 캄리를 비롯 툰드라 그리고 렉서스 GS를 비 추천 목록으로 하향 강등시켜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불량률 증가와 경쟁사들의 제품 품질 향상 – 아이러니컬하게도 토요타의 생산방식을 연구해서 달성된 것이 대다수였다 – 이라는 문제들은 오쿠다 사장 이후 토요타의 전문 경영인 체제의 경영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사실 1999년 오쿠다 사장이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의 사장들 (조 후지오, 와타나베 가츠아키)이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사장을 지냈던 도요타 쇼이치로 사장에 비해 뛰어난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도요타 아키오 부사장의 부친인 도요타 쇼이치로는 오늘 토요타의 큰 수익원으로 발전한 렉서스 브랜드를 런칭한 장본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토요타를 세계적인 친환경적인 회사라는 이미지로 탈바꿈해준 세기적인 역작, 프리우스 (Prius) 하이브리드 자동차조차 그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전문 경영인 체제였던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토요타의 차종들은 도요타 쇼이치로 이후 큰 변함이 없었고 전세계 시장에서의 양적인 성장을 통해 GM을 능가하는 세계1위의 기업이 되자는 것이 경영목표가 된 것 같았다. 이에 대해 도요타 쇼이치로와 오쿠다 히로시를 포함하는 토요타 원로들은 최고경영진의 능력에 대해 걱정한 듯 하며 토요타가 미국 텍사스에 미국의 8번째 공장을 세우게 되자 이 결정에 의문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토요타가 미국에 다수의 생산시설을 세우게 된 것은 미국시장에서 늘어나는 판매량에 따른 미국 내 반감을 고려한 것이다. 즉, 이러한 현지 생산시설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직업을 제공하여 시장에서 증가하는 토요타에 대한 미국 내 정치적, 사회적 반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토요타 원로들의 급속한 생산능력 증가에 대한 걱정은 불행하게도 현실화되었다.

2008년말 뉴욕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붕괴와 시작된 금융위기는 미국 내 실물경제에게도 전이되었고, 2008년 하반기에 급속도로 냉각된 미국 소비자들의 구매심리를 토요타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결국 2008년 12월 15일, 북미에서 쌓여만 가는 재고를 줄이기 위해 최신시설의 미시시피 공장에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결과들은 토요타의 원로들이 와타나베 사장의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든 듯 하다.

3. 대기업병에 맞서라
2008년 전 세계에 880만대의 자동차를 팔아 세계 1위의 자동차회사가 된 토요타. 하지만 1등에서 추락한 GM의 모습을 보면 1등이란 위치는 몰락이란 저주가 함께 동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세기 초반에 대량생산 방식을 고안했던 포드자동차를 추월한 이후 거의 100년간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였던 GM. Tiered and segmented product, 즉 초.중.고급 차종들을 서로 중복되지 않는 다양한 브랜드들에 배치하여 소비자들을 유인하였던 알프레드 슬론 (Alfred Sloan) – MIT출신의 엔지니어로 GM의 2대 회장으로 근대경영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경영자–, 미국인들에게 뛰어난 자동차 디자이너로 기억되는 할리 얼 (Harley Earl)등 쟁쟁한 인재와 실력을 지닌 GM이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왜곡된 노사관계, 악화된 생산성 등으로 2009년 스스로를 분해해야하는 상황에 했다.

한때 스승으로 여겼던 GM의 현 상황이 토요타 원로들에게 일종의 반면교사가 되었을까. 도요타 아키오도 인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 토요타는 관료주의적이며 두터운 층의 관리제도, 일본중심적인 사고방식 및 소극적인 경영방식이라는 대기업병에 중독되어 가고 있었으며 최근의 경영실책에서도 드러나듯 전례가 없는 대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4개월 후 토요타의 수장이 될 도요타 아키오는 누구이며 회사는 어느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 그가 누군인지 잠깐 살펴보자.

4. 토요타 아키오
도요타 아키오는 토요타 자동차 임원들에게서 보기 드문 해외파이다. 1956년 일본 나고야 태생으로 1979년 게이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1982년 미국 매사추세츠에 있는 밥슨대학(Babson College)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었다. 졸업 후 할아버지의 회사인 토요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뉴욕과 런던에서 투자은행가와 컨설턴트로 근무했었다. 하지만 포르쉐 가문 출신들이나 포드 가문 출신들의 전례들과 비슷하게 그도 도요타라는 창업가문의 이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27살의 나이에 토요타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던 그에게 아버지인 토요타 쇼이치로 사장은 처음에 이를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1984년 토요타에 입사하게 된 도요타 아키오는 북부 캘리포니아의 프리몬트(Fremont)에 위치한 GM-토요타 합작사인 NUMMI (New United Motors Manufacturing Inc.)에서의 근무를 포함 다양한 직책을 거치게 된다. NUMMI 시절 함께 근무했던 토요타 측 미국동료들은 그가 영어를 매우 잘 구사했으며 검소하고 자신이 도요타 가문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입사에 관련되었던 아버지의 걱정이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사내에서 아키오에게 닥친 문제는 일본인들과 일할 때였다. 창업자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 때문인지 업무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한번은 직속 상사와의 불협화음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질시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가 25년 동안 토요타에서 쌓은 업무성과는 아버지를 비롯 토요타의 원로들에게 사장 후보감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52세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토요타 제국을 이끌어 가는 초석이 되었다.

신임 사장이 토요타에 가지고 올 변화를 예상해본다면 우선 글로벌 기업에 맞는 기업 문화의 변화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토요타 본사의 일본중심의 경영방식은 해외의 직원들에게 불만의 소지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토요타 본사 이사진 중 그동안 선임된 외국인이 2명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두 명조차 결국 회사를 관뒀다는 점에서 우리는 토요타의 기업문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토요타의 첫 번째 외국인 이사였던 짐 프레스(Jim Press)는 크라이슬러 부회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갔다. 수십년간 북미 토요타에서 근무한 토요타 맨으로 북미 토요타 회장까지 지냈던 그는 크라이슬러로 이직한 후 자신의 옛 회사에 대해 쓴소리 – 예를 들어 토요타 프리우스의 개발에 일본 정부가 지원을 했었고 이는 불공정한 사례라고 공개 발언했었다 – 를 하기에 이르렀다. 토요타에 충성을 다했으나 뛰어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가이진(일본말로 외국인)’으로 본사에서 받은 차별에 쌓인 불만이 뒤늦게 표출된 것일까. 아무튼 과거의 토요타 사장들과 달리 영미권에서 근무했고 영미권 문화를 잘 이해하는 도요타 아키오의 등장은 국내외 인재들을 토요타 사상 처음으로 요직에 기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경영능력의 강화를 예상하게 해준다.

사실 토요타에 닥칠 변화의 예고편은 이번 2월21일 발표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직 토요타 임원인 이나바 요시의 복귀이다. 이나바 요시는 북미 토요타 판매 (TMS) 사장 출신으로 1968년 교토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대 중반에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켈로그 (Kellogg)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에서 받았으며 토요타의 미국, 중동, 유럽등 해외 오퍼레이션에서 근무한 해외통이다. 이러한 면에서 도요타 아키오와 유사한 점이 많으며 이나바 요시가 신임 사장의 최측근이 될 가능성을 한 층 높이고 있다.

이나바 요시의 기용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과거 일본 자동차 업계에서 퇴직자를 데려 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는 점이며, 도요타 아키오가 향후 토요타를 운영해 나갈 방향을 예고하는 첫 사례일 수 있다는 점이다. 토요타 내부자에 의하면 이나바 요시의 첫 임무는 판매량 격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미 토요타의 판매망을 재정비하는 것이며, 머지 않은 시점에 북미 토요타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토요타의 제조 및 제품개발 분야들도 전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도요타 아키오가 신경을 쏟고 있는 또 다른 사안은 렉서스이다. 토요타의 고급브랜드인 렉서스는 1989년 미국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경쟁업체들에 비해 판매량이나 수익성에서 성공적이였지만 도요타 쇼이치로가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다. 렉서스 차종들을 보면 베스트셀러인 크로스오버 RX350을 제외하고 경쟁사들의 경쟁차종들에 비해 판매가 저조하며 SC 컨버티블과 같은 차종의 경우 아직 후속차종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없다.

더욱이 할로카(halo car ; 상징적인 자동차)로 개발되었던 LF-A 초 고급 스포츠카는 수년째 출시 소문만 무성한 채 소비자들을 혼란시키고 있는 등 렉서스는 제품적인 면에서 아직까지도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다. 이에 도요타 아키오 부사장은 NUMMI 재직시절 동료출신이기도 한 미국 내 렉서스 담당 매니저 등에게 렉서스와 관련 최근에 많은 문의를 하고 있다고 전해지며, 그의 이러한 움직임은 현대의 고급 브랜드 진출 움직임과 시기적으로 겹치고 있어서 흥미롭다 하겠다.

5. 토요타 경영을 가이젠 (改善)하라
도요타 아키오가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십수년 전의 한 인터뷰에서도 말했듯이 사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처럼 도요타 가문의 경영 재 참여는 모두의 환영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사내의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원로들의 지지가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토요타 내부에 형성된 대기업병을 수술하면서 발생할 내부와의 마찰, 그리고 힘든 경영환경에서 더 격화될 경쟁업체들의 도전에 있어서 토요타 구성원들의 단결과 이해가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도요타 아키오에게 있어서 도요타라는 창업가문의 성이야말로 향후 토요타에 발생할 변화에 따른 고통을 조직원 모두가 이겨내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에 머물던 일본이 大政奉還 (타이세이호칸)을 통해 새롭게 수립된 천황 지도체제 아래 근대화되었듯.




하여튼 토요타는 알아줘야 해요. -_-;;;; 
기껏 돌아온게 다시 도요타 가문 사람이라니. ㄱ-
다시 창업자 일가가 해 먹겠다는 소리로군. ㄱ-


기사 제공 : 글로벌 오토뉴스

  1. 이건 뭔가 맞지 않는데, 임진왜란은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기의 말년에 발생한 일대 사건.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의 난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2.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시기는 1603년. 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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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phia

여기에 우리나라 차도 있더군요. 쌍용차!!! 너네 디자인 제대로 안 해!!! ㄱ-




자고로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불과 수년전만해도 소위 얼굴에 칼을 대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성형수술 사실이 밝혀진 연애인들을 질타하던 목소리는 어디가고 쌍커풀은 기본이요, 코 세우는 것은 선택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남자에게도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美의 르네상스'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하지만, 자동차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와 같아서 모든 자동차들이 아름답다고 칭송을 받지는 못했다. 수많은 평범한 모델들과 그보다 더 많은 덜 아름다운 자동차들. 그리고, 이번 지면에서 말하고자하는 '못생긴' 자동차 들이 존재했다. 기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거한 '정말 못생긴 세계의 자동차들 베스트 10'. 외모에 의해 됨됨이까지도 판단하는 세상에 대해 질타를 날리면서도 내심 거울을 보며 한숨을 짓고 돌아와 글을 계속 써가는 기자의 모습. '가장 못생긴 자동차 베스트 10'을 작성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지만 여러분께 계속 소개해보고자 한다.

Pontiac Aztek
폰티악은 당시 MPV와 크로스오버 SUV의 열기에 맞춰 젊은 세대들을 겨냥한 폰티악 아즈텍을 선보였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하기엔 너무 비싼 가격과 순간 착시를 일으키는 듯한 프론트디자인은 2005년의 단종으로 이어졌으니...


Lancia Thesis
란시아의 떼시스는 란시아의 기함모델이다. 각 메이커들의 기함모델이라면 그 브랜드의 최대 역량이 표현된 모델이어야 하건만, 란시아의 떼시스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선을 통해 면을 만들어간 모습은 보닛부분이나 헤드램프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디자인은 분명 눈에 띄는 디자인 이긴 하나 한발 물러서 보면 각 요소들간의 조합이 너무도 어색하다. 미간이 너무 넓지않은가!


Ssangyong Rodius
안타깝지만 국내 메이커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쌍용 로디우스. 구지 이런 자리에 소개하지 않아도 국내에서 출시됨과 동시에 수많은 네티즌들의 질타를 들어야 했던 모델이다.


Kia Amanti(국내명: 기아 오피러스)
사실 오피러스의 디자인을 논하는 것은 분명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찬반논란이 충분히 있을 것이라 보인다. 하지만, 국내시장에서도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후 판매량이 급격히 증가한 것을 보았을 때 초기 모델의 디자인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해외에서의 디자인 평은 혹평의 연속이었다. 기아 씨드의 디자인에 대한 찬사에는 거의 '아만티를 소개했던 기아가..'라는 말로 씨드의 디자인 우수성을 부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Gumpert Apollo
페라리 엔초페라리, 람보르기니 부르시엘라고, 벤츠 SLR 등 한 세대를 대표하는 초고성능 슈퍼카들에겐 상상을 초월하는 성능도 한몫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멋진 외관이 있기에 감히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검포트의 아폴로는 분명 '슈퍼카'이다. 650마력의 출력에 100km/h 가속시간 3초. 하지만, 페라리,람보르기니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면 결과는 뻔하다. 못생겼지 않는가.


Ford Scorpio Mark II
자동차 메이커의 대형세단으로서 이러한 밋밋하고 구분되지않는 디자인은 브랜드력으로 제품을 선택하는 구매자들에겐 통할지 모르겠지만 이젠 어림도 없는 소리. 1994년 1세대 모델의 선전을 등에 없고 등장한 포드 스코피오 마크2는 출시된 지 4년만에 사라졌다.


Porsche Cayenne
포르쉐에서 SUV를 출시한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의 포르쉐 본연의 색을 잃어간다는 비평을 해왔으며 최초 공개 당시에도 911을 부풀려놓은 모델이라며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포르쉐 카이엔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포르쉐의 괄목할만한 성장의 디딤돌이 된 모델이다. 최근 리스타일링된 카이엔은 점차 개선된 외관을 선보이고 있지만, 역시 초창기 데뷔모델은 포르쉐 팬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Peugeot 4007
미쯔비시와 푸조, 시트로엥은 하나의 플랫폼으로 서로 다른 3종의 SUV 모델을 선보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푸조 4007. 푸조 특유의 캣페이스가 너무도 크게 늘어난 듯한 전면부 디자인부터 전후비율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귀여운 프랑스 고양이가 어울리기엔 덩치가 컸다.


Fiat Multipla
디자인이 기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디자인 때문에 기능이 의심받는 것은 더욱 안될 일이다. 피아트 멀티플라는 그일을 해냈고 이 다재다능한 차량은 못생긴 외모로 외면받았다. 안타깝다.


Alfa Romeo SZ
알파로메오는 어느 브랜드보다 인상적인 스타일링을 자랑한다. 그러나, 알파 로메오의 3.0리터 스포츠 쿠페 SZ는 '못생겼다'. 다른 여타의 메이커라면 용서가 될 디자인이지만 알파로메오에서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너무 터프하고 단조롭다.



기사&사진 제공 : 글로벌 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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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phia
죄송합니다. RX-7 파트의 집필이 늦어지는군요. (ㅜ.ㅜ)
Mazda의 자료가 늦게 나오는 관계로 지금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은 완성된 Savanna의 파트만이라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RX-7 파트와 나머지도 완성되는 즉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번역 문제는 묻지 마세요. 번역기 돌리고 제가 손 봤으니까요.

연재 순서
1. Mazda Rotary Engine의 역사와 모터스포츠(1961~1978)
2. 사반나~RX-7의 전설(1971~2002)
3. 일본차 최초, 최후의 승리. 르망 24시간 정복 프로젝트(1970~1991)
4. 부활의 불사조. RX-8의 등장(2003~)
5. 로터리 엔진의 미래(2007~)


들어가기 전에
- 지난 편에서는 로터리 엔진 차량이 나온 순서대로 소개를 했지만 이번에 나오는 이 30년간의 이야기는 Mazda의 Rotary Engine Machine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거대한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편에서는 Motorsports와 여기에 참전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그 외의 차량에 대해서는 간략히 다루는 방식을 취하겠습니다. 또한 당초에는 본 편 안에 르망 24시간 도전기를 다룰 계획이었으나 자료가 방대한 관계로 따로 다룹니다.

2. 사반나~RX-7의 전설(1971~2002)
1) 로터리 vs GT-R 전쟁
(1) 사반나 RX-3(1971~1977)


1971년에 출시된 Savanna RX-3

1971년 9월. Mazda는 Familia Rotary Coupe를 대체하는 스포츠 쿠페인 Savanna를 출시했다. 해외 수출명은 RX-3. Familia Rotary Coupe가 R100, 초대 Luce Rotary Coupe가 R130, Capella Rotary Coupe가 RX-2였기에 사반나에게는 그 뒤의 명칭인 RX-3이 붙었던 것이다.
출시 당시 Savanna는 Cosmo Sport와 Familia Rotary Coupe에 얹힌 10A형 엔진을 얹었지만 엔진의 정식명칭은 달랐다, Savanna에 얹힌 엔진은 최후의 10A형 엔진으로 코드는 0866. 최고출력 105ps의 엔진인 것이다.


Savanna에 얹었던 10A/0866 엔진. 최후의 10A형 엔진이다.

Mazda Savanna RX-3
차명 : Savanna RX-3
형식 : S102A
수출명 : M102B(또는 RX-3)
보디형식 : 2DR Coupe
전장 : 4,065mm
전폭 : 1,595mm
전고(높이) : 1,350mm
휠베이스 : 2,310mm
엔진 : 직렬 2로터 10A
압축비 : 9.4
최고출력 : 105ps@7,000rpm
최대 토크 : 13.7kg.m@3,500rpm
구동방식 : FR
최고속도 : 180km
변속기 : 4MT
기어비(①/②/③/④/ⓡ) : 3.737/2.302/1.435/1.000/4.024

이 Savanna가 중요한 것은 역대 Rotary Engine을 장착한 차량 최초로 AT(자동변속기)을 도입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Rotary Engine을 장착한 차량은 전부다 수동변속기만 얹었는데 Savanna를 필두로 로터리 엔진에도 자동변속기가 얹히게 된 것이다.

Mazda Savanna RX-3(본 자료는 RX-3 GR의 자료이다)
차명 : Savanna RX-3
형식 : S102A
수출명 : S102K(또는 RX-3)
보디형식 : 2DR Coupe
전장 : 4,065mm
전폭 : 1,595mm
전고(높이) : 1,375mm
휠베이스 : 2,310mm
엔진 : 직렬 2로터 10A
압축비 : 9.4
최고출력 : 105ps@7,000rpm
최대 토크 : 13.7kg.m@3,500rpm
구동방식 : FR
최고속도 : 180km
변속기 : 3AT
기어비(①/②/③/ⓡ) : -

Savanna가 처음으로 레이싱에 나선 것은 바로 1971년 12월로 출시된 지 3달 만의 일이었는데 마침 그 달에 제 6회 후지 투어리스트 트로피(Fuji Tourist Trophy)가 열렸던 것으로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스카이라인 GT-R과 Savanna RX-3이 드디어 만났던 것이다. Mazda의 기록으로 알아보자.


1971년 Fuji Tourist Trophy에서 역주중인 Savanna RX-3

1971年12月の第6回 富士ツーリスト・トロフィーレースに、マツダは3台のカペラと 10Aエンジンを搭載した1台のサバンナで参戦した。9月に発売されたばかりのサバンナは、初のレース参戦(レーシング10Aエンジン搭載、リアサスペンションにワットリンクを採用)だった。日産、マツダともに次々とワークスマシンがリタイアしていく中、スカイラインGT-R(通称スカG、久保田/杉崎組)対 サバンナとの一騎打ちに。最後の最後でスカGがトラブルに見舞われ、サバ ンナがスカGの50連勝を阻止した。(1971년 12월의 제6회 후지 투어리스트 트로피 레이스에 Mazda는 3대의 Capella와 10A엔진을 탑재한 1대의 Savanna가 참전했다. 1971년 9월에 출시되어 발매된 지 얼마 안 된 사반나는 이번 대회가 첫 레이스 참전(레이싱용 10A엔진 탑재, 리어 서스펜션에 와트 링크를 채용)이었다. 닛산, 마츠다 모두 차례차례로 워크스 머신이 리타이어 해 나가는 중에 스카이라인 GT-R(스카G, 쿠보타/스기자키 조) 대  사반나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마지막으로 스카 G가 트러블에 휩쓸려 사반나가 스카 G의 50연승을 저지했다.)

Skyline GT-R의 50연승 저지. 당시 49연승을 달리면서 왕좌에 올라있던 GT-R이 최초로 그 자리에서 밀려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히로시마에서 온 RX-3였다. 그리고 해는 바뀌어 1972년.


1972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Savanna RX-3이 독주하는 장면

1972年5月の日本グランプリレースには、レーシング12Aエンジン(48mmツインチョーク・ウェーバー付、240bhp/9000rpm)を搭載したサバンナが3台出場し、スカイラインGT-R(通称スカG)を抑えて1~3位を独占した。レース後、日産チームがブリッジポート(高出力を目指した補助ポート付のインテーク)に関してクレームを発表。レースオーガナイザーはその是非を明確にしなかったが、これがのちに、50基以上を製作しモータースポーツユーザーに供給するという条件でのペリフェラル・ポート解禁につながった。(1972년 5월의 일본 그랑프리에는, 레이싱용 12A엔진(48mm 트윈 초크 웨버(Twin Choke Weaver) 첨부, 최고출력 - 240hp/9000rpm)을 탑재한 사반나가 3대 출장해, 스카이라인 GT-R(통칭 스카 G)을 억제해 1~3위를 독점했다. 레이스 후, 닛산 팀이 브릿지 포트(Bridge Port, 고출력을 목표로 한 보조 포토가 첨부 된 인테이크)에 관해서 클레임을 발표. 레이스 Organizer는 그 시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후에, 50기 이상을 제작해 모터스포츠 유저에게 공급한다고 하는 조건으로의 페리퍼럴[peripheral] 포트 해금으로 연결되었다.)

72년 5월의 경주에서 우승한 Mazda였지만 닛산이 클레임을 거는 바람에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Mazda 역시 기술 개발에 더욱 중점을 쏟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불과 4달 만에 또 붙었다.


1972년 GC 시리즈 레이싱 대회 시상식의 모습(2008년 9월, 일본쪽 유저들에게 물어본 결과 GC 시리즈 제 4전 후지 마스터 토너먼트 250km 레이스 대회 슈퍼 투어링 TS-bc의 시상식 사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1위에는 마스다 겐키, 2위에는 오카모토 야스히로, 3위에는 테라다 요지로가 올랐다.)

1972年9月、GCシリーズ富士インター200マイルレース大会・スーパーツーリング TS-bcレースにて、サバンナはスカイラインGT-R(通称スカG)と熾烈な戦いを繰り広げたが、スカGに1位を譲った。同年10月 のGCシリーズ第4戦富士マスターズ250キロレース大会・スーパーツーリングTS-bcレースでは、カペラ(増田)が優勝。RX-3(従野)がポール・ポジションを取り、またもスカGとのトップ争いとなったのだがリタイア。ラップ14で周回遅れのRX-3(武智) にスカGがクラッシュした結果、カペラ(増田)が優勝した。(1972년 9월, GC시리즈 후지 인터 200마일 레이스 대회 슈퍼 투어링 TS-bc레이스에서 사반나는 스카이라인 GT-R(스카 G)와 치열한 싸움을 펼쳤지만 스카 G에 1위를 내줬다. 동년 10월의 GC시리즈 제 4전 후지 마스터 토너먼트 250킬로 레이스 대회 슈퍼 투어링 TS-bc 레이스에서는 마스다의 카펠라가 우승했으며 요리노의 RX-3이 폴 포지션(Pole Position)을 취해 다시 한 번 스카G 와의 톱 싸움이 되었지만 리타이어했다. 결국 14랩이 지연된 RX-3(타케치)에 스카G가 충돌한 결과, 카펠라(마스다)가 우승했다.)

그리고 1973년, 일본 그랑프리.


1973년 일본 그랑프리의 RX-3

1973年5月の日本グランプリレース大会では、上位7位までをサバンナ・レーシングRX-3が独占した。完全制覇を狙った11月の富士グランドチャンピオンレースでは最高回転数を9,500rpmまで上げて、コースレコードを樹立。ポールポジションを得たが、直前のレース事故で大会が中止された。更に同年のオイルショックで結局、スカイラインGT-R (スカG)との対決は実現しなかった。(1973년 5월의 일본 그랑프리 레이스 대회에서는, 상위 7위까지를 레이싱용 사반나 RX-3이 독점했다. 완전 제패를 노린 11월의 후지 그랜드 챔피언 레이스에서는 최고 회전수를 9,500 rpm까지 올리고, 코스 레코드를 수립. 유리한 입장을 얻었지만 경기 직전의 레이스 사고로 대회가 중지되었다. 더욱 동년의 오일 쇼크로 결국, 스카이라인 GT-R (스카 G)과의 대결은 실현되지 않았다.)

1973년 오일 쇼크는 스카이라인 GT-R(형식명 KPGC110)의 단산과 Mazda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연비가 나쁜 Rotary Engine은 기름을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내리막 길을 걸었고 Mazda는 결국 투어링카 레이싱에서 철수했다.


1974년 후지 그랜드 챔피언 시리즈에서 개인적으로 출전한 Savanna RX-3

1974年、燃費改善のための5ヵ年計画「フェニックス計画」に伴い、マツダはツーリングカー・レースから撤退することになった。一方で富士グランドチャンピオンシリーズへのエンジン供給とプライベート・チームの支援を通じて、モータースポーツ・エンジニアリングの火を灯し続け、ロータリーエンジンの名声を維持した。(1974년 연비 개선을 위한 5개년 계획 「피닉스 계획」의 일환으로 마츠다는 투어링카 레이스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후지 그랜드 챔피언 시리즈의 엔진 공급과 프라이빗 팀의 지원을 통해서,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링을  계속 진행해 로터리 엔진의 명성을 유지했다.)

Savanna RX-3와 스카이라인 GT-R의 대결은 1973년을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지만 RX-3은 그 사이에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1976년 5월 일본 그랑프리에서의 Savanna RX-3

オイルショックでスカGとの争いに決着はつけられなかったが、すでにサバンナ・レーシングRX-3は無敵のマシーンとなっていた。1976年5月には日本グランプリのTS/ GTS-Bレースで優勝し、国内レース単一車種通算100勝という金字塔を打ち立てた。その後も、数々のレースでこの記録を更新した。(오일 쇼크로 스카 G와 벌인 싸움의  결과를 볼 수 없었지만 벌써 레이싱용 사반나 RX-3은 무적의 머신이 되고 있었다. 1976년 5월에는 일본 그랑프리의 TS/ GTS-B레이스에서 우승, 국내 레이스 단일 차종 통산 100승이라고 하는 금자탑을 수립했다. 그 후에도, 수많은 레이스를 통해 이 기록을 갱신했다.)

Savanna RX-3이 레이싱에서 거둔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1971년 12월 - 富士ツーリストトロフィー 総合1位 サバンナRX-3 国内レースの1勝目(후지 투어리스트 트로피 종합 1위 사반나 RX3, 국내 레이스 1승)
1972년 5월 - 日本グランプリ(TS-bレース) 総合1位(일본 그랑프리 (TS-B 레이스) 종합 1위)
1972년 8월 - 全日本鈴鹿300キロ・ツーリングカー 総合1位(전일본 스즈카 300km 투어링카 종합 1위)
1973년 5월 - 日本グランプリ(TS-bレース) 総合1位(일본 그랑프리 (TS-B 레이스) 종합 1위)
1973년 8월 - 鈴鹿グレート20ドライバーズ(Tレース) 総合1位(스즈카 그레이트 20 드라이버즈(T 레이스) 종합 1위)
               富士グランドチャンピオンシリーズ(スーパーツーリングカークラス) チャンピオン(후지 그랜드 챔피언시리즈(슈퍼 투어링카 클래스) 챔피언)
1974년 12월 - 富士ツーリストトロフィー 総合1位(후지 투어리스트 트로피 종합 1위) - 개인적 참가 시작
1975년 5월 - 日本グランプリ(TS/GTS-Bレース) 総合1位(일본 그랑프리(TS/GTS-B 레이스) 종합 1위)
1975년 10월 - 富士マスターズ250キロ 総合1位(후지 마스터스 250km 종합 1위)
               富士グランドチャンピオンシリーズ(スーパーT・GTレース) チャンピオン(후지 그랜드 챔피언 시리즈(슈퍼 T GT 레이스) 챔피언)
1976년 5월 - 日本グランプリ(TS/GTS-Bレース) 総合1位  サバンナRX-3 国内レース100勝目(일본 그랑프리(TS/GTS-B 레이스) 종합 1위 사반나 RX-3 국내 레이스 100승 달성)
1976년 9월 - 富士インター200マイル(スーパーT・GTクラス) 総合1位(후지 인터 200마일(슈퍼 T GT 클래스) 종합 1위)
               富士グランドチャンピオンシリーズ(スーパーT・GTレース) チャンピオン(후지 그랜드 챔피언 시리즈(슈퍼 T GT 레이스) 챔피언)
1978년 2월 - IMSAシリーズ ディトナ24時間レース GTU  リタイヤ(IMSA 시리즈 데이토나 24시간 레이스 GTU 리타이어)
1978년 5월 - 富士日本グランプリ(TS/GTS-Bレース) 総合1位(후지 일본 그랑프리(TS/GTS-B 레이스) 종합 1위)
1980년 9월 - IMSAシリーズ RSクラス チャンピオン(マニュファクチャラーズ)(IMSA시리즈 RS클래스 챔피언(매뉴팩쳐러스))

Savanna RX-3은 1977년에 단산되었지만 단산된 다음해인 1978년에도 두 차례 레이싱에 나섰으며 단산된 지 한참 된 1980년에도 레이싱에 나서 제작사 부분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1978년을 기해 해외에도 도전을 했지만 첫 레이싱에서는 리타이어를 했다. 하지만 이후 나온 RX-7은 확실히 모터스포츠에 발을 들임으로써 GT-R vs. Rotary 그 30년 라이벌 역사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진 : Okura Auto, Mazda
자료 제공 :  Mazda, Carlife


* 일본 고단샤(강담사)와 2&4 모터링이 만든 자동차 비디오 잡지 Best Motoring 2002년 6월호에 Skyline 2000 GT-R(형식명 PGC10)과 Savanna RX-3이 오랜만에 대결했다. 드라이버는 Skyline 2000 GT-R에 쿠로사와 모토하루(黑澤元治, 당시 BM 진행자, 전 닛산자동차 레이서), Savanna RX-3에 카타야마 요시미(片山義美, 1968년 Marathon de la Route 참전자, 85년 Le Mans 24시간 참전자, 70년대 로터리 엔진 머신 레이서)가 나와서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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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ph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