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대 팬텀은 롤스로이스의 전통과 BMW의 탁월한 식견이 만들어낸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 입에 바른 소리도, 지나친 칭찬도 아니다. ‘굿우드의 유령’이 닫힌 문을 여는 순간, 워프터빌리티 (Waftability)의 세계가 시작된다 Photographer Kim Hanjun
롤스로이스 팬텀은 유령(phantom)과도 같은 존재다. 1천200여만 대의 자동차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는 이 나라 어디에서도, 1천만 여명이 모여 사는 수도 서울의 그 어떤 곳에서도 파르테논 신전을 형상화한 이 차의 웅장한 그릴과 독대했다는 이를 만나보기 어렵다. 런칭 행사를 갖고 공식 시판에 들어간 지 반년 여가 지났건만, 팬텀의 주인된 자는 9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마 이 도시, 이 나라가 100여 년 전통을 짊어진 브랜드의 권위(롤스로이스는 지난해 창사 100주년을 맞이했다)와 팬텀의 위압적인 이미지를 채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일 터. 그것은 또한 80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완성된 ‘유령의 마음’을 온전하게 이해해줄 주인이 충분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도시 이 나라와 섞이지 못해 우리 모르는 세상에서 배회하던, 영국의 새 보금자리 굿우드에서 빚어진 롤스로이스의 유령이 마침내 그 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 최고의 프레스티지 리무진, 길이×너비 5.83×1.99m의 거대한 차체를 이끄는 V12 6.75ℓ엔진, 국내 시판가격 6억5천만 원…. 그 동안 우리의 뇌리에서 팬텀을 지배해온 그 어떤 표현과 사실도 장대한 카리스마를 토해내는 유령의 실체 앞에서는 본뜻을 잃고 산화해버린다. 팬텀의 스타일링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하나의 세상이 되어있다. 누구도 닮지 않았고 누구와도 닮을 수 없는 독보적인 디자인 영역. 거대한 심장을 담은 프런트 노즈는 고개 숙일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당당하게 콧대를 세웠다. 맞바람을 아랑곳 않고 90。 각도로 똑 떨어진 라디에이터 그릴은 숙련된 기능공의 눈대중 만으로도 정확한 핀 간격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80년 팬텀 역사의 산증거이다. 지붕 높이는 정확히 타이어 지름의 2배가 되는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고, C필러는 뒤 시트 승객의 머리가 완전히 감추어질 만큼 두텁다. 운전석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리어 윈도는 그 크기까지 비좁기 이를 데 없어 드라이버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영국 도로교통법의 테두리 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였음을, 과거의 팬텀은 후진하는 차가 아니었음을 알고 나면, 운전수의 볼멘소리는 모두 부질없는 투정일 수밖에 없다. 반드시 기억하자. 지금 바라보는 유령의 완벽한 비례가 런던 노팅힐 부근의 허름한 은행 건물에서 거리를 오가는 오래된 팬텀을 바라보며 완성한 롤스로이스의 새로운 DNA임을. 하느님께 감사하자. 영국인 치프 디자이너 이안 카메론이 지휘하고 크리스 뱅글이 최종결정을 내린 결과물이 21세기 초입을 술렁이게 한 BMW의 파격적인 기함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다행스러운 현실을.
50년대 이전의 설룬처럼 트렁크리드를 살포시 내린 클래식한 뒷모습은 바라보는 이를 압도하는 앞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시선을 조금만 낮춰 보면 남몰래 숨어있던 스포티함이 정체를 드러낸다. 265×790mm의 거대한 타이어가 튼실한 휠아치를 모자람 없이 채웠고 이를 향해 바싹 당겨진 앞 오버행이 또한 거침 없다. 바람의 흐름을 고려해 살짝 오므라든 엉덩이는 뜻밖에도 탄탄한 인상. 기나긴 뒤 오버행을 따라 매끈하게 솟아오르는 차체 밑동도 길이 5.89m의 거구에게 믿어지지 않는 속도감을 안긴다. 스포티함, 탄탄함, 속도감…. 중급 럭셔리 세단에나 흔히 쓰던 표현들이 21세기의 팬텀에게도 어울릴 줄은, 미처 몰랐다.
도어를 열어 따스하고 희미한 흰색 조명이 어둠을 밝히는 팬텀의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거물을 진정한 거물로서 다루어준 BMW의 현명함에 다시금 감사하게 된다. 나뭇결이 살아있는 원목과 최고급 천연가죽으로 단장한 인테리어는 누군가의 말마 따나 ‘흠집 하나라도 나면 RR 전시장에서 10년은 일해야 할 것’처럼 호화롭기 그지없다. 가죽 내장을 여민 한 땀의 바느질에서도, 오래된 기계식 장비를 보는 듯한 계기판의 섬세한 바늘에서도 굿우드 공장을 가득 메운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롤스로이스의 정신은 도어 핸들을 당겨 여는 동작부터 시트에 앉아 아주 작은 장비를 다루는 행위까지 생생히 살아있다. 승객에게는 팬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손수 컨트롤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디오도, 실내온도를 6개 구역으로 나누어 조절하는 6존 에어컨도 기존의 전자식 장비들과는 다르다. 다이얼과 ‘바이올린 키’를 일일이 돌리고 눌러가며 조작해야 하는 수동 방식.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전통의 굴레에 얽매여 아집을 부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편의장비를 다루어가며 차와의 끊임없는 교감을 유도하는, 근래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차 만들기’의 진수다. 초호화 리무진이라는 사실에 매달려 첨단화된 인테리어만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팬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 눈에 보이는 첨단장비라면 BMW i드라이브를 떠올리는 ‘RR 컨트롤센터’와 7시리즈와 같은 이그니션 키펍(key-fob), 엔진 스타트/스톱 버튼과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 등을 들 수 있겠다. 하나 같이 편안하고 안락한 운전을 돕는 영리한 도구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말아라. 운전석에 앉은 이상, 당신은 뒷자리의 주인을 모시는 ‘팬텀의 운전수’라는 사실을!
높은 지붕과 좌우로 활짝 열리는 코치 도어는 ‘롤스로이스로의 우아한 입장’을 돕는다. 낮은 지붕이나 필러를 피해 머리를 구겨넣을 필요가 없고 뒷자리에 타려고 더러운 타이어 근처까지 갈 일도 없다. 드라이버와 소담을 나누기에 딱 알맞은 거리에는 천연가죽을 입은 독립형 뒤 시트가 마련되어있다. 등받이에 몸을 누이면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다. 빈틈없이 햇빛을 차단하는 이중 블라인드까지 치고 나면 완벽한 프라이버시 공간이 된다. 거듭 생각해보면 팬텀의 후방시야가 그토록 형편 없는 것도 모두 팬텀의 주인만을 배려한 결과다. 뒷자리 전용 편의장비의 종류는 일일이 들지 않아도 좋겠다. 무엇을 의심하는가? 이 차는 세계 최고의 초호화 세단 팬텀이다. 뒷자리에서 조수석 시트를 밀고당길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것이 의아하지만 그 역시 팬텀의 오너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하인만 없다 뿐이지, 그들은 21세기의 귀족이다. 팬텀의 드라이버라면 엔터테인먼트 모니터나 접이식 테이블을 뒷자리 오너가 쓰기 편하도록 조절할 수 있는 센스는 주문 제작된 우산이 뒤 도어 틈새에 꽂혀있는 것 또한 주인에게는 한 톨의 빗방울도 묻히지 않으려는 의도.
이쯤에서 막연하기 그지 없는 ‘팬텀의 정신’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겠다. 추상적인 개념인 ‘정신(spirit)’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수록되어있지 않은 전통적인 롤스로이스만의 단어 ‘워프터빌리티(Waftability)’로 갈무리된다. ‘둥실둥실 실어 나른다’는 의미의 ‘waft’와 ‘능력’을 뜻하는 ‘ability’가 결합된 이 신조어는 승차감이나 주행감각을 가리키기도 하고 디자인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배의 밑부분처럼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팬텀의 밑동이 바로 워프터빌리티 라인이다.
어지간한 미니밴 만큼이나 높게 자리한 시트에 몸을 묻고 길다란 보닛 끝에서 날아다니는 ‘플라잉 레이디(flying lady)’에 시선을 맞추면 팬텀과의 황홀한 여정을 위한 준비는 끝이다. 아, 또 한가지! 팬텀의 클래식한 스티어링 휠을 잡는 가장 이상적인 위치는 8시 20분 방향이다. 팔꿈치를 편안하게 내리고 양쪽 손목이 ‘팔(八)’자가 되도록 자연스럽게 벌린 채 가볍게 림을 쥐어주면 그만. 손안에 감기는 느낌이 좋은 스티어링 림은, 그러나 꼭 그 자리에서만 편안할 수 있게끔 디자인한 것처럼 다른 위치를 쥐었을 때의 운전자세가 영 어색하다. 엄지손가락을 올려둘 돌기도, 오디오 리모컨 버튼도 스티어링의 아래쪽에 몰려있다.
팬텀이 제안하는 운전방식을 조금이라도 어길라치면 불편함을 떠나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치욕이 몰려온다. 와인딩 로드를 눈앞에 두고 스티어링 휠의 윗부분을 거머쥐어도, 파란 신호등이 켜지는 것에 발맞춰 급하게 액셀러레이터를 짓눌러도, 혹은 V12 엔진의 능력을 검증하려고 시속 200km 이상의 맞바람을 부시고 달려도 이 같은 불쾌감은 한결 같다. 고집스러운 팬텀은 파도 위를 유영 하듯 한없이 푸짐한 여유를 만끽하며 달릴 때라야 비로소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밀고 온다. 어떤 일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건만, 팬텀 스스로가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흥분한 드라이버의 가슴을 가라앉히는 기분. 생명력을 가진 차가 사람과의 정서적인 교류를 바라는 듯한, 매우 색다른 경험이다.
하지만 굿우드의 유령을 마냥 말랑말랑한 쇼퍼드리븐카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직분사 방식의 V12 6.75ℓ엔진은 1천rpm에서 이미 최대토크의 75%와 맞먹는 57.1kg·m의 힘을 내고 3천500rpm이면 73.5kg·m의 토크가 나온다. 저속과 고속회전영역의 구분 없이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 같이 우러나는 토크야말로 ‘워프터빌리티 드라이브’를 완성하는 지름길이다. 덧붙여 시속 200km에 이르면 속도계 왼쪽에 마련된 파워 리저브(power reserve) 게이지는 V12 엔진에 아직 50%의 힘이 남아있음을 가리킨다. 팬텀의 퍼포먼스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운전감각은 뜻밖에도 무척 솔직하다. 노면정보를 과장해 전달하거나 철저히 은폐하는 일도 없다. 스티어링 휠과 페달, 플로어와 등받이로 ‘톡, 톡’ 올라오는 가벼운 진동이 의외다. 어떤 상황에서든 수평을 유지하려는 에어 서스펜션은, 그러나 도로의 굴곡과 기울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최첨단 기술로 완성된 초호화 리무진에게 기계로서의, 아주 원초적인 자동차의 감성이 느껴질 때 가슴은 다시 한번 아릿한 감동에 젖는다. 팬텀 시승을 앞둔 전날에는 몇 톤 무게의 부담감에 짓눌려 밤잠을 설치고 말았지만, 정작 팬텀을 만나러 가는 길에 배어나온 알 수 없는 미소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싶다. 새로운 세기의 팬텀을 가장 롤스로이스다운 모습으로 가꾸어놓은 엔지니어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탄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롤스로이스 직원이나 팬텀을 시승했다는 에디터와 만난 이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은 2가지 뿐이다. “몇 대나 팔렸어요?” “어떤 사람이 산 거죠?” 단 1명도 워프터빌리티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고객의 프라이버시 보호’는 롤스로이스의 철칙 중 하나.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은, 팬텀을 품에 안은 몇 안 되는 사람 중에는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40~50대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이다. 팬텀이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해야 하는 현실만큼이나 이질적인 상황. 아직도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부담스러워 팬텀에 다가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해줄 얘기는 오직 하나 뿐이다.
“롤스로이스의 정신을 입고 팬텀의 워프터빌리티를 만끽하라!”
Specification: Rolls-Royce Phantom
Price : 65,000만 원
Tech : V12 6749cc, 453마력/5350rpm, 73.5kg·m/3500rpm, 6.3km/ℓ
Performance : 0→시속 100km 가속 5.9초, 최고시속 240km
Transmission : ZF 6단 자동, 뒷바퀴굴림
기사&사진 제공 : 탑기어 한국판 사이트(탑기어 5월호에 실려 있었습니다.)(http://www.topgearkore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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