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엉성해~~
지난 6월 22일, 가나무역의 직원이신 김선일씨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피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내외에서 이번 사건을 특종으로 다뤘고, 한국이슬람중앙회의 사이트에는 많은 네티즌들의 협박성 글들이 올라왔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 어떠한 것으로 다가 오고 있는가? 이번 글을 통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사실 이슬람교의 기본 교리는 기독교, 더 나아가서 유대교와 비슷한 교리를 지니고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인데, 요셉과 이스마엘의 대립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교리가 분화되었고, 예수가 승천했다는 A.D 33년을 계기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분화되었다. 기독교의 교리가 완전히 정립된 시기는 325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케아라는 도시에서 열린 공회를 통해 아타나시우스의 3위일체론(Trinity論)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슬람교는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마호메트(아랍어로는 무하마드라고 한다.)가 유대지역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하는 것이 바로 이 이슬람교이다.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말이라면 ‘한손에는 코란, 한손에는 칼’이란 구절인데, 사실 이슬람교는 본래 다른 종교에는 관대한 편이다. 다만, 타 종교를 믿는 자에게는 '지즈야‘라는 것을 부과하는데, 이것은 성인 남자의 머리 수당 세금을 내는 인두세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에게는 이 인두세마저도 면제가 되었다. 따라서 문제의 구절은 ’한손에는 코란, 한손에는 지즈야‘로 고쳐야 한다. 이슬람교의 교리상 특징이라면 모세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지만, 마지막 선지자인 무하마드를 믿는 이슬람이 가장 정통적이라는 것만 강조한다.
이슬람교에는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두 파가 있다. 현재 정통은 수니파로 이들은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 알리와 그 후계자(정통 칼리프라고 한다.)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되 있으며, 시아파는 일종의 분파로, 유파가 많은 편이며, 이들은 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제 4대 칼리프)를 정통 칼리프로 보고, 그 사자들을 이맘(종교 지도자)로 보았으며, 유파마다 해석이 다른 신성을 부여할 정도였다.
이건 여담이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 테러리즘은 같은 단어가 될 수 없다. 많은 이슬람 연구 학자들은 이슬람 테러리즘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아래는 연세대 통일연구원 교수이신 강규형 박사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전략)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서구의 눈부신 발전은 이슬람세계에 강력한 도전이 됐다. 이슬람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마지막 대리인인 무하마드를 믿는 자신들이 제일 발전해야 하는데도 서구에 뒤지는 이유가 무하마드의 교리를 정확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무하마드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원리주의(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란에서 시아파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난 뒤 원리주의자들의 주장이 강해졌다.
원리주의자 중 일부는 서구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테러에 귀의하는 데 이것이 반(反) 이스라엘 투쟁과 더불어 오늘날 이슬람 테러리즘의 배경이다. 그러나 이슬람세계 중에는 근대화와 세속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세계체제에 순조롭게 편입하려는 터키와 같은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슬람과 이슬람 원리주의는 동의어가 될 수 없고, 또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중 일부가 테러리스트가 되는 경우가 있을 뿐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 테러리즘이 동의어가 돼서도 안 된다.(후략)
그런데 일부 과격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다른 선량한 이슬람교도들까지 피해를 보고 있다. 특히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같은 경우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테러 단체의 중심으로 낙인찍힐 정도였다.(오류가 있을 경우 수정하겠다.)
그 배경을 필자는 지하드의 왜곡된 해석과 세계사의 흐름에서 찾고 싶다. 지하드는 성전으로서, 신의 도를 위하여 분투, 노력하는 것이 본래의 뜻이었으나 옛날부터 이교도에 대한 전쟁으로 적고 있다(이슬람 신비주의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소지하드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이슬람세계의 방위를 위해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지하드를 강조하고 있는 형편으로, 이러한 것은 반외세, 그중에서도 반 서양문명, 반미(反美)로 특징이 되고 있다.
또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데에는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한 몫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그 이전에도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의 소식을 미국을 통해 받아왔기 때문에, 다른 아랍 국가의 이야기는 많이 왜곡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친미적인 성향을 많이 띄고 있으며, 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다른 아랍국가들 보다 이스라엘에 대한 좋은 소식만을 받아왔다. 이것은 중간에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유파동이 터진 이후에는 이런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서 잠시 이스라엘이 건국된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가자.
1896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시온주의(Zionism)는 본래 ‘유태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비엔나의 언론인 헤르즐(Teodor Herzl)이 유럽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자기들끼리 따로 나와 독립한 순수 유태인 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헤르즐의 책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유태인들은 어디에다 국가를 세울 것인지 논의한 결과 그들이 2000년 가까이 떠나 살았던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선택했다. 시온(Zion)은 유태교의 성지인 예루살렘(Jerusalem)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따라서 시오니즘=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이다. 그런데 여기에 맞 물려가지고 영국이 발표한 두가지 선언이 문제가 되었다. 바로 ‘맥마흔 서한(정식명은 맥마흔 선언)’과 ‘발포어(밸푸어) 선언’이다.
먼저 맥마흔 선언은 1915년 10월 24일 이집트주재 영국의 고등판무관인 A.H. 맥마흔이 메카의 샤리프인 후세인과의 5회에 걸친 왕복서한 중에서 시리아의 서부를 제외한 아랍인 거주의 오스만제국령에 전쟁 종료 후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지지할 것을 약속한 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인해 ‘메카의 수호자’후세인은 1916년 6월 5일을 기해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아랍 민족의 왕임을 자처했다. 그의 아들인 파이잘과 영국인 T.E. 로렌스가 이끈 베두인(사막 유목민)부대는 신화적인 전투 끝에 터키군을 물리치고 다마스쿠스(現 시리아의 수도)에 입성한다.
밸푸어 선언은 1917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A.J. 밸푸어가 제 1 차세계대전 때에 유대인을 지원해주기 위해, 대전 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데 동의한 선언으로, 이것은 유대계 영국인 은행가이고 시오니스트 연맹회장인 N.M. 로스차일드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명되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아랍인에게 대전 후의 독립국가건설을 약속한 후세인-맥마흔협정(1915),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서 중동의 터키영토 분할을 결정한 사이크스-피코협정(1916) 모두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이 선언에 대하여 미국은 즉시 지지하였으며, 18년에는 프랑스·이탈리아도 지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이 두 선언을 내뱉은 영국은 1948년 5월 15일 부로 팔레스타인에서 철수, 동일에 시온주의 지도자인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한다. 이것은 아랍민족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이스라엘과 다른 아랍국가들이 연합해서 전쟁을 했지만 이스라엘이 거의 모든 전선에서 승리하게 되고, 약 100만명 가까이 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이스라엘을 저주했다.
1956년에는 이스라엘에 167만명의 유태인이 살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벤 구리온과 그가 속한 마파이당의 행정부와 의회를 수립하고 모든 유태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귀환법’을 제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은 아랍인은 겨우 2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충 이것이 이스라엘의 건국 역사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건국이 될지는 몰라도 다른 아립인들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수니파에게는 이번 전쟁에서 미국이 보여준 여러 행동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파병? 국익을 고려하면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안전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이건 차라리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정부는 먼저 국민들의 안전부터 보장하고 그 뒤에 파병을 하도 무방할 것이다.
참고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역사에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생각해 보자.
만일 미국과 영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다른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한다고 판단할 때 이스라엘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무력으로는 어느 정보 버틸 수 있지만, 부품이 부족해지게 되면 이란과 이라크간에 벌였던 전쟁에서 이란이 보여줬던 꼴을 그대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우리 정부도 이에 대응해 이라크에서의 무력대응을 피해야 할 것이다.
별첨 : 아래의 내용은 이슬람 테러단체의 역사이다. 잘 읽어 보시길 바란다.
‘지하드’는 원래 하느님(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싸운다는 뜻이다. 종교적인 의미가 짙은 지하드를 현재와 같은 무장투쟁 세력으로 바꾼 것은 20세기 초 반영(反英) 독립운동을 벌였던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다.
1928년 이집트의 하산 알반나가 설립한 무슬림형제단은 아랍 전역으로 퍼져나가 아랍 국가들의 정치와 종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중조직으로 발전,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알반나는 코란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이슬람’으로의 복귀를 주장, 이슬람 부흥운동(이슬람 근본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81년 친미(親美) 노선을 표방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암살한 것도 이들이다.
그러나 이슬람 교리 자체가 유혈투쟁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자살테러 같은 극단적인 무장투쟁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뒤 아랍국들은 두 차례 중동전쟁을 일으키지만 패전한다. 67년 3차 전쟁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싸움을 전 아랍권으로 광역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여파로 많은 이슬람 운동세력들이 강경노선으로 전환됐다. 73년의 4차 중동전쟁에 이은 중동평화협상을 둘러싼 이슬람 내 노선 갈등은 하마스 같은 무장단체들의 활동을 부추겼다.
현재 이슬람 무장조직으로는 헤즈볼라나 하마스 외에도 현재 이집트의 ‘자마아트 이슬라미야’, 알제리 무장무슬림그룹(GIA) 등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유대 테러조직 ‘카흐와 카하네차이’가 있는데, 극우 시온주의자 메이르 카흐네가 창설한 이 조직은 94년 헤브론에서 팔레스타인인 29명을 살해했으며 95년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암살했다.
자료 제공 : 거꾸로 읽는 세계사(유시민 作)
이슬람 원리주의의 도전(강규형 박사의 글,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200109250270)
다음 백과사전(http://100.daum.net )
원문이 있는 곳으로 가기
글 : 전에 본인이 블로그인의 회원이었을 때 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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