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관련 잡지가 아닌 곳에서 레이서를 다루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뉴스한국이 일을 냈네요. 뉴스한국이 박정룡 감독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교수 박정룡(朴禎龍·49) 선수는 1987년 우리나라 최초로 ‘모터스포츠’를 선보인 사람이다. 그는 ‘서킷의 신사’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리며 한국 카레이서들의 희망이 되었다. 부드러운 이미지의 아담한 체격 조건을 갖춘 그. 그러나 서킷에 오르기만 하면 살아 있는 눈빛과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런 그가 2003년부터는 레이스 대신 경기진행 관련과 ‘아주자동차대학 모터스포츠학과’ 교수로 대학 강단에서 진두지휘 중이다.
희귀 학과인 ‘모터스포츠’와 현시대 인지도를 고려한 교육관은 무엇인가.
_ 과거보다 현재는 많은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자동차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모터스포츠학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 사람들이 모터스포츠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미 모터스포츠를 접하고 레이스경주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다. 6~7년 전, 한 리서치 회사에서 서울지역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래희망을 물은 적이 있다. 그 중 카레이서가 1등을 차지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것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직업의식이 어느새 많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아주자동차대학에서 교수로 강단에 선 이상 학생들에게 미래의 직업군으로 모터스포츠를 소개하면서 인생도 함께 가르치고자 한다. 교육목표가 단순히 성적 향상이기보다는 모터스포츠를 통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는지, 인생을 어떻게 즐기며 살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다. 공부라는 차원을 넘어 인생에 도전하고 성취하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얘기하고 싶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깊이 사고할 수 있으면 모든 일을 잘 처리해 나갈 수 있다. 세상을 살기 위해 어떤 부분에서는 반드시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적극적으로 승부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지속적인 도전이 있길 바란다.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한 사람이다. 그러한 자세가 인생에 중요하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교수가 되어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무엇인가.
_ 요즘 학생들은 여가 시간을 활용할 때 인터넷밖에 하지 않아 불쌍하고 안타깝다. 무엇인가 자연 친화적인 놀이와 활동을 찾아서 실천에 옮겼으면 좋겠다. 가끔 학생들과 함께 야외로 낚시를 간다.
자동차 이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적인 유대감과 팀워크를 기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오면 그것을 만질 줄도 모른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물고기 손질하는 법을 가르치고 여러 사람과 나눠 먹는 즐거움을 가르친다. 그래도 학생들은 나를 제일 무서워한다. 까다롭고 무섭게 하는 경우는 자동차를 가지고 실습을 할 때다.
정신이 산만하고 느슨하면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엄격히 가르치며 지도한다. 모터스포츠는 안전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동차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자동차 경주의 첫째가 안전한 상태에서 빠르게 스피드를 내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을 찾아야 하기에 집중력이 좋아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실전과 연습 때는 철저하게 지도한다. 반면 교수로서 보람을 느낀 일은 평소 나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레이스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최초로 모터스포츠를 시작했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수하고자 했을 때 대학 쪽에서 먼저 모터스포츠학과를 개설하고 교수로 초빙했다. 정규 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모터스포츠에 대해 좀더 체계적으로 강의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사회생활 속에서 제대로 전해줄 수 없는 것을 수업 과정을 통해 자세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 기쁘고 만족스럽다.
레이스에선 박정룡 교수를 ‘서킷의 신사’라고 부른다. 어떻게 붙여진 별명인가.
_ 레이스 할 때 관객이 붙여준 별명이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경기에 임하다보니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서 우승할 때는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카레이싱 역사가 짧다 보니 국내보다는 외국에 나가서 경기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지금은 2003년부터 레이스를 중단하고 경기관련 진행을 하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눈(?)이 모두 풀렸다. 두 눈 부릅뜬 호랑이가 아니다.
재미있는 일은, 내 출생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화장실 뒷간 정랑에서 태어났다. 마흔두 살의 어머니가 12번째 막내인 나를 낳을 당시 자식이 많아 무심했다. 자라며 위로 여러 명의 형님들이 먼저 일찍 세상을 떴다. 아들로서는 나 혼자 살아남았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지만 ‘화장실에서 태어난 모진 인생’이니 꿋꿋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내겐 있다. 이런 사람이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호랑이’가 되었다는 것도 인간 승리다.
유년의 추억과 카레이서가 되고자 결심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 달라.
_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강원도 인제로 이사 왔다. 유년시절은 조용한 소년이라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여느 산골소년과 다를 바 없이 개구리 잡아먹기, 가재 잡아먹기, 냇가에서 물장구치기 등이 전부다. 당시는 생활이 곤궁하던 터라 학교에서는 빈 도시락에 옥수수죽과 빵을 급식해 주었다. 12남매 중 모두 일찍 죽고 1남 5녀만 살아남았다. 내가 막내인 데다 어릴 적엔 키가 작아 반에서 항상 3번을 했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도 귀여워하며 잘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바로 위 누나가 서울에 가서 직장을 다니다가 화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와 같이 지냈다. 누나의 상처에서 매일 피고름을 짜주고 약을 발라 주며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기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인문계보다는 공업계에 진학해서 기술을 배워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글쓰기, 붓글씨 쓰기, 펜글씨 등을 잘 했다. 하지만 정작 재능을 나타낸 것은 자동차 관련 일이다. 그 시절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며 운전수 아저씨 옆자리에 앉아서 자동차 운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옛날 버스는 운전석 옆에 엔진이 있어 뜨끈뜨끈했는데, 한여름 더운 날씨에도 그 부분에 앉아서 운전하는 것을 보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엔진소리, 기어를 변속하는 자세 등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교수 이전에 카레이서가 된 계기와 이력을 소개해 달라.
_ 1982년도에 기아자동차에 입사해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다. 전문 기술직인 테스트드라이버 일이다. 그러다가 1984년도에 일본에 연수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자동차 경주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자동차 경주가 열리지 않아 흥미로웠다. 일본은 이미 방송에서 자동차 경주를 생중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회사에서도 그곳에 서킷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국내에서 1987년도에 자동차 경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처음으로 기아에서 만든 자회사 제품 ‘프라이드’ 승용차를 가지고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당연 1등을 차지했다. 첫 경기였기에 별다른 규정이 없었고 무제한 차였으며 15명이라는 선수가 참여했다. 두 번째 경기에도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나가 20명 중 1등으로 영종도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청포대, 몽산포, 모래시장을 돌아다니며 경주를 해 영광스럽게도 최고의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 잘해 주체 측에서 시합을 제한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갖은 설득 끝에 맨 나중에 출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당당히 모든 대회에서 1등을 했다. 많은 상을 휩쓸었음은 물론 기아자동차 ‘프라이드 전성시대’를 여는 공로를 세웠다.
그 후 1990년도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문 카레이서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자동차 튜닝 전문점을 열었다. 1년 정도 유지하다가 일본에서 시합을 제의 받고 건너가 정식으로 프로 카레이서가 되었다. 일본이 한국보다 30년 정도 앞선 상태라 한국 자동차로 경기에서 우승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스폰서도 없어 큰 난관에 부딪혔다.
여러 가지 모색 끝에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용인 서킷이 생길 때까지 자생해야 했다. 이후 프로팀이 생기며 거기에 합류했다. 1993년에 비포장, 1994년에 포장 서킷이 개장되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산 자동차경주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말보르 담배회사에서 레이싱프로팀을 만들어 선수로 출전했다. 월급이 70만 원 정도였다. 이후 담배광고가 금지되면서 레이싱 팀이 해체되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계속 경주에는 참가했다. 중간 중간 스폰서가 없어서 힘들었고, 빚도 지게 돼 가장 힘들고 어려웠다.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결국 7년 동안 타던 기아차를 포기하고 티뷰론 현대차로 옮기면서 다시 1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44세에 아주자동차대학교가 생기면서 2005년 9월에는 교수로 초빙되었다. 한국 자동차경주 1호 주자여서 선택된 것이다.
모터스포츠를 국내에 처음 소개할 당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_ 처음에 우리나라에서 카레이싱을 한다면 좋은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레이싱에 대한 인식이 낮아 레이서들을 비난하기 일쑤였다. 실제 카레이싱 경기는 매우 고급스포츠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난폭 운전하는 ‘폭주족’으로 오인해 줄곧 비난을 했다. 그럼으로 인해 이 방면의 일들이 정식 직업으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경비가 많이 들어 자금력이 취약했다.
카레이싱을 수입원으로 창출해내기까지 무수한 노력과 시간이 들었다. 당연 레이서들이 생활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모든 월급과 수입을 자동차에 투자하기에 그 어떤 스포츠보다 어려웠다. 자본이 없으면 일상생활에서 연애를 하거나 결혼하는 것도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가지로 많이 개선되었다. 인식도 좋아졌고, 스폰서가 따라붙어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이 해결되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현재는 연륜이 쌓여 익숙하고 편하다.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 ‘모터스포츠로 멋진 인생을 살아야지’, ‘프로가 되어야지’ 따위의 생각이 많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에 따라 순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시기가 되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준비할 뿐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결할 만한 대안점을 찾을 수 있다.
카레이싱은 재미가 있다. 소리와 스피드 내는 기술을 익히며 더욱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피드를 즐기는 것이고, 이후 기계적인 기술 습득과 운전자의 기량을 발휘해 진정한 즐거움에 이르는 것이다.
카레이서의 자격조건은 무엇이며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가.
_ 카레이스는 차 자체가 안전하게 경주하고 운전자를 잘 보호하도록 갖추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이보다 안전한 스포츠는 없다. 레이서가 거의 안 다친다. 한국 자동차경주 역사가 20년에 불과하지만 이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이 없다. 일반도로에서 진행한 ‘제주도 랠리’에서 1명 사망한 기록밖에 없다.
나 역시 다쳐본 경험이 없다. 기술이 바탕이 되면 사고가 나는 순간에도 최대한 방어할 수 있다. 또한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일반도로는 오히려 위험하기에 서킷에서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그리고 레이서의 자격조건은 덩치가 크거나 무거우면 안 좋다. 성격적인 면에서도 아주 냉정한 사람이 잘할 수 있다. 거칠고 둔탁하며 남성적인 기질이 강한 사람은 오히려 힘들다. 레이서들은 체구도 작고 조용하며 말수가 적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냉정한 판단력과 치밀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카레이싱에서는 더 유리하다.
카레이싱에서 제일 중요하게 개발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
_ 자동차 전체적인 부분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중 경주는 무엇보다 서스펜션이다. 차를 크게 구분하면, 엔진과 구동계, 그리고 차체와 아래에서 차의 움직임을 흡수하고, 충격을 완화해 주고, 코너링을 좋게 하는 서스펜션이 있다. 카레이서는 그 부분의 경기다. 서스펜션의 움직임을 어떻게 이루어내는가, 서스펜션의 세팅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이미 자동차 경주의 기술은 개발되지 않은 것이 없다. 준비가 모두 되어 있다. 운전자는 서킷에서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멘트하고 피드백해서 엔지니어가 해결한다. 부분적으로 포괄적인 기술이 세계 수준에 이르러 있다. 또한 레이싱 카의 디자인과 색깔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 컬러를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디자인해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가가 관건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자동차와 유니폼을 빨간색으로 선택했다. 차와 함께 유니폼도 강렬하게 어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카레이서는 일종의 광대다. 관객을 모으고 자동차 제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 외 디자인 역시 성능과 연결 지어 카레이서가 코멘트를 하고 피드백 한다.
카레이싱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주나 레이싱 카는 어떤 것인가.
_ 랠리 카다. 자동차 경주에는 랠리와 레이싱으로 나눈다. 그중 나는 랠리 쪽이 좋다. 국제대회는 거의 랠리지만 우리나라는 랠리가 없다. ‘파리-다카르 랠리’는 파리-알제리-아프리카-사하라사막을 횡단하는 21일간의 사막 경기다. 거기에 최초로 외국경기 랠리에 참가한 것이 바로 나다. 제일 큰 대회가 ‘파리-다카르 랠리’로 아시아자동차의 군용 지프차를 기아자동차에서 개조해 참가했다. 기아자동차에서 사막이 뭔지도 모르고 참가했던 대회다. 영화 ‘인샬라’에서 알제리 내란 시기의 이야기가 바로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치룬 경기를 바탕으로 한 내 이야기다.
어울림모터스 ‘스피라’와 맺은 인연은 무엇인가.
_ 카레이서로서 ‘박정룡은 60세까지 레이서 경기를 한 사람이다’는 이미지로 각인되고 싶다. 그런 생각은 지금 더욱 간절하다. 처음 레이서를 그만 두고 나서 ‘승부’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자 다시 레이서 생활이 그리워졌다. 그러다 어울림모터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의 계기를 통해서다.
한국레이스에 다시 출전할 수 없어 아시아 랠리에 가기 위해 학생들과 경주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울림모터스에서 ‘스피라를 몰아줄 수 있느냐’고 의뢰가 들어왔다. ‘스피라’는 경주용 신형 자동차다. 게다가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스포츠카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스피라’ 아니었으면 거절했을 것이다. 기존에 출시된 자동차는 별로 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스피라’는 전혀 새로운 모델이라 매력적이었다. 원래 스포츠카, 슈퍼카는 대기업에서 만들지 않는다.
군소업체들이 기술만을 가지고 고급 스포츠카를 만들어서 고가로 판매한다. 희귀성과 퍼포먼스에 매료된 사람들이 주로 구매한다. 다량 생산이 아니라 몇 대 정도만 만들어 판매하기에 성능만 인정이 되면 이런 종류의 자동차는 금방 명차가 된다. 일반 자동차회사는 시중에 시판되는 보통 자동차를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고, 진짜 고급자동차는 전문성을 확보한 특정회사가 기술력을 바탕으로 명품 브랜드 자동차를 만든다. 이는 타본 사람만이 안다.
지난 아마추어 자동차 경주대회인 ‘2008엑스타타임트라이얼’에서 우승한 소감은 어떠한가.
_ 당시 어울림모터스의 ‘스피라’가 서킷에서 경주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곳에서 테스트를 하고 그날 곧바로 서킷에 처음 올라갔다. 다른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완주를 하고 스피라가 우승을 하면서 인식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8년 전부터 개발과정을 통해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히 스피라의 성능을 성공적으로 입증해 보였다.
다만 앞으로 ‘한국에서 그런 차를 만들어서 얼마나 판매를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이것은 어울림모터스가 짊어진 숙제다. 다만 성능을 만족스럽게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레이스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결과다. 그것이 증명되면 자동차 생산은 보다 쉽게 이루어진다. 레이스만큼 화려한 조건이 없고, 또 반면 가장 힘든 조건이다. “어울림모터스에서 만든 스피라다. 자동차가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으니 봐라, 의심하고 있을 때 만드니까 되지 않느냐” 분명히 보여준 대회다.
이제 자동차가 성공을 거두었으니 나로서는 기쁘지만 대회 자체의 우승은 좀 쑥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한 프로 선수기 때문이다. 대부분 선수들의 수준이 내 기량과 비교가 안 된다. 따라서 이번 경주는 프로들이 하는 GTM대회가 아니었기에 선수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왜 프로가 여길 나와” “뭐야 같이 하는 거, 영광이잖아” 등 상반된 의견이 엇갈렸다. 사실 레이싱 카만 이상이 없으면 내가 우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난 지금까지 대한민국 1호 프로 우승주자를 굳히고 있으니까.
향후 보안하고 싶은 점이나 후진에게 바라는 사항이 있다면 무엇인가.
_ 한국에서 모터스포츠는 전반적으로는 꼭 발전해야 될 분야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산업기반이 자동차를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터스포츠가 발전하지 않고는 해외에 자동차 수출이 어려워진다. 언제까지 자동차를 다량 생산해서 싼값으로 수출할 것인가. 기술력은 모터스포츠로 입증된다. 세계 모든 자동차 브랜드와 메이커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자동차 회사들이 유지되고 세계 속에 경쟁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 차 좋다’가 아니라 ‘우리 차 좋은 것을 보여주마’다. 그것이 모터스포츠를 통해 이뤄진다. 그래서 이 분야는 자동차 회사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순수하게 스포츠만으로 그 가치를 가질 수 있다. 프로 농구, 프로 야구, 프로 축구 등은 발전할 만큼 발전했다. 앞으로 시대에 맞게 발전할 수밖에 없는 분야가 바로 이 모터스포츠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이에 발맞추어 발전을 서둘러야 한다. 투자를 해야 한다. 자동차 회사들이 얻은 수익을 서킷에 투자하여 사회에 환원하는 행위도 중요하게 고려될 부분이다.
또한 정부에서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질주하는데 규제만 할 것이 아니라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정식으로 레이스 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자동차를 좋아해 달리고 싶어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하는 것과 같다. 공간을 주지는 않고 규제만 하려 드는 것은 정부와 기업이 함께 일신해야 할 문제다. 해외에서는 모터스포츠를 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자동차를 팔겠느냐고 반문한다.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국내에도 레이싱 경주를 하는 서킷과 문화가 도입돼야 한다. 우리나라 자동차가 값싼 차로 인식되는 것은 그런 문화적 차이점 때문이다. 그 비근한 예로 금호타이어가 미국 시장에서 판매 우위를 차지하는 것도 모터스포츠에 투자한 회사의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감안해 정부의 발 빠른 대처와 지원이 필요하다.
카레이서 박정룡
아주자동차대 모터스포츠학 교수 프로필
1982~90 기아자동차 중앙기술연구소 실험팀 근무
1984~86 일본 마쯔다자동차 기술연구소 연수(드라이빙스쿨 수료)
1987 카레이스데뷔
1990~ 월간자동차생활 시승위원
1997~ 한경자동차신문 시승위원
1998 (주)옥시 불스원샷 TV CF 모델
1999~ 카맨파크(주)이사
2000 korea.com 선포식“사이버 명예의 전당 33인”에 선정
2000~ SBS 모터스포츠 해설위원
2000~ 정수기능대학 객원교수
2000 국제 드라이버 라이선스 A 취득(국내유일)
2001 월간 프라우다 편집위원
2002~ GP korea 칼럼리스트
2003 개인 사진전 “박정룡 그리고 모터스포츠의 역사” 개최
2003~ KMRC 경기위원장(BAT GT 챔피언십)
2003~ 현대, 기아자동차 홈페이지 운전테크닉 연재 중
2005~ 한경.com “박정룡의 드라이빙 테크닉”연재 중
2005~ 월간 AUTO RACING 편집위원
2005, 8~ 아주자동차대학 모터스포츠전공 교수
2005. 11~ 저서 “톱 레이서 박정룡의 베스트 드라이버로 가는 길”펴냄
2005. 10 용인시 행정타운 개관기념 “자동차 도자기” 최초 전시회
2006. 3 여주대학 자동차과 튜닝과정 강의
2006. 5~ CAR-TV 시승기 프로그램 출연 중
2006. 7~ MBC 강력추천 토요일 “강추 드라이빙스쿨” 출연
2006.~ 국가정보대학원 특수운전기술 강의 중
2006.~ SBS SPORTS 모터스포츠 해설위원
2006.~ SPEED FESTIVAL 심사위원장
2007.~ CAR TV “박정룡의 드라이빙 다이어리” 진행 중
2008.~ 월간 AUTO CAR 로드테스터 박정룡 레이스 경력
1987 카레이스 데뷔
1988 “파리-다카르 랠리” 한국인 최초 참가
1987~93 한국 최초의 카레이스 대회 “제2회 전국자동차경주대회” 우승을 비롯해
국내 오프로드 레이스 최다우승기록
1987~03 국내 레이스 및 랠리대회 40여회 우승기록
1994~95 인터내셔널 말보로 레이싱팀 감독 겸 선수
1995 한국모터챔피언십시리즈 N1-A 초대 시리즈 챔피언 획득
1995 세계랠리챔피언십(WRC) 호주랠리 N2우승(기아자동차팀)
1996 세계랠리챔피언십(WRC) 인도네시아랠리 N2우승
1996 WRC 뉴질랜드, 호주랠리 참가
1996 아시아 태평양 랠리챔피언십(APRC) 중국랠리 F2우승
1997 세계랠리챔피언십(WRC) 호주랠리 N3우승
2000 아시아 태평양 랠리챔피언십(APRC) 태국랠리 A6 2위
2000 WRC 뉴질래드, APRC 중국랠리 참가
2000 일본 인터내셔널 ALPINE 랠리 A7 우승
2001 일본 인터내셔널 Pokka 1000km 내구레이스 S-E우승
2001~02 일본 수퍼다이큐 시리즈 풀 시즌 참가 다수 입상(금호 엑스타팀)
2002 일본 수퍼다이큐 시리즈 C-2 종합4위
2002 일본 토카치 24시간 내구레이스 4위
2003 태백 내구레이스 우승
글은 뉴스한국의 최정숙 객원기자였습니다. 박 감독님. 존경합니다. ㅠ.ㅠ
전 감독님의 영원한 빠돌이가 되겠습니다. ㅠ.ㅠ
어울림모터스 만세 ㅠ.ㅠ
추신 : 김범훈 선수, 2승 축하드리고 GT270을 탔던 이승진 선수, 고생하셨어요. 완주 축하하고요. ㅠ.ㅠ 더운 날씨에 죽다 살아나셨는데, 8월에 우승 빌께요. ㅠ.ㅠ
기사&사진제공 : 뉴스한국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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