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기행의 국가 영국 출신 잡지 아니랄까봐, 한국판 톱기어 제작진들의 똘기 또는 만행을 그 자리에서 보여주는 기사가 있습니다.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니에서 24시간 지내기[각주:1], 예전엔 24시간 서울시내 레이스[각주:2], 얼마 전에는 TG WRC[각주:3]. 이번엔 뭐?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와 란에보?? 후.........
평론 포기, 그냥 보시죠.
Photography by Studio Up
2008. 11. 8. 12:50 PM -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지하철 3호선
'란에보가 이길지, 비행기가 이길지 제대로 붙어보자고!'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였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톱기어> 팀은 부산에서 열릴 롯데와 삼성의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경기를 예상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열렬한 롯데 마니아인 편집장까지 가세해 승자를 점칠 무렵, '내일 직접 가서 볼까요? 비행기 타면 금방 가요'라고 최윤섭 기자가 농담을 던진다.
편집팀 내에서 '덤 앤 더머' 형제 같다고 불리는 나와 최윤섭 기자. 나 역시 농담으로 화답했다. '에이 비행기는 무슨, 차가 더 빨라요. 비행기가 빠르긴 하지만 공항까지 가고 오는데 시간 다 버려요. 비행기는 날고 있는 동안만 빠를 뿐이지.' '야! 상식은 이 세상 진리야. 비행기가 빨라.' '아니에요, 차가 빨라요.' 대화는 점점 유치짬뽕 한 그릇을 말고 있었다.
<톱기어>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가 빠를까 비행기가 빠를까. 나의 주장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부산을 왕복해가며 얻은 확실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최윤섭 기자 역시 다년간 비행기를 타고 부산을 오가면서 얻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 제대로 붙어보는 수밖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동차가 빠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의 '위시 리스트'를 펼쳤다. 어떤 차를 타야 비행기를 꺾을 수 있을까?
200마력은 족히 넘어야 하고, 장거리이기 때문에 그랜드 투어링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뿐인가? 조금 늦다 싶으면 제대로 '쏴야' 하기 때문에 순발력, 가속력, 제동력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의 목적지는 부산. 사직야구장을 세상에서 제일 큰 노래방으로 만들어버린 열정의 사나이들이 사는 곳 아닌가? 기왕이면 그들의 입맛에도 맞는 차이어야 한다. 따라서 스타일링도 신경 써야 한다. 아, 젠장! 어디서 그런 차를 구하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던 찰나,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미쓰비시로부터 걸려온 전화. 희망의 벨 소리였다. '내일 랜서 에볼루션 시승 가능하겠어요?' 이럴 때 쓰는 말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 아닐까. 란에보라니. 내 머리 속 희망 리스트 최고점에 올라 있었던 모든 후보들이 일순간 자취를 감췄다. 랜서 에볼루션. 우리가 란에보라고 부르는 이 차. 만화 <이니셜 D>를 봤던 세대라면 아키나에서 AE86의 불패 신화를 꺾어버렸던 존재.
뇌 안쪽 깊숙이 각인된 바로 그 란에보 말이다. 시승차는 10세대 란에보로, 4B11 2.0리터 트윈 스크롤 터보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295마력, 최대토크 41.5kg·m의 성능을 낸다. 트윈 클러치 SST 트랜스미션으로 한치의 오차 없이 출력을 실어 나르며, S-AWC로 다져진 네바퀴굴림 구동계로 시종일관 도로를 꽉꽉 물고 달리는 바로 그 괴물. 그런 란에보로 비행기와 결투를 한다? 자! 이젠 <타짜>의 아귀처럼 손목을 묶는다 해도 내게 돈을 걸어도 좋다. '개봉박두, 커밍 순!'
2008년 10월 8일 낮 12시 20분. 준플레이오프 경기가 열리기 6시간10분 전이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자리한 MMSK 본사에서 파란색 란에보 키를 받아 들었다. 이곳에서 수석기자와 대결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시동키를 돌렸다. 숨죽이고 있던 계기판이 붉은 열정으로 물들고, 수동기어를 꼭 닮은 SST 셀렉트 레버를 움직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이제 나는 경부고속도로로, 그는 김포공항으로 향할 것이다. 부산 사직야구장까지 거리는 서울 만남의 광장을 기점으로 약 380킬로미터. 란에보를 다그치면 3시간 30분 안에 주파할 수 있지 않을까? 자자, 서두르자고.
마음은 너무너무 급한데, 도대체 이 나라의 교통관제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평일, 그것도 점심 시간의 고속도로는 신갈 IC까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작부터 SST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려고 했거늘.... 답답하다. 내비게이션 도달목표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간다. 서울 톨게이트에서 표를 받은 뒤 한 시간이나 지났건만, 아직 경기도 용인 땅을 벗어나지 못했다.
란에보의 편의성만을 써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될지 모른다. 락포드 오디오의 음질이라든가? 음 또 뭐가 있지? 휑해 보이는 이곳에서 편의장비를 찾는 것은 너무 사치일까? 짜증이 절정에 도달하려는 순간, 드디어 도로가 뚫렸다.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자마자 란에보의 드로틀을 풀로 전개하리라.
SST를 스포츠로 맞추자 D6가 D5로 한단계 내려가면서 엔진 사운드가 거칠어진다. 아예 다 무시하고 패들시프트의 '-' 레버를 당겨서 3단부터 풀 가속을 시작한다. 방금 내리막에 접어든 롤러코스터의 느낌이 이럴 것이다. SST는 빠른 주행에 어울리는 기어비를 재빠르게 찾고 타코미터는 레드존 7천rpm까지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치고 올라온다. 쇠가 갈리는 듯한 카랑카랑한 배기 사운드를 뿜으며 란에보는 본연의 컬러를 보란 듯 펼친다.
스티어링 휠을 잡은 두 손이 이렇게 흥분되기는 오랜만이다. 그의 완벽한 토털 밸런스를 펼쳐보일 와인딩은 아니지만,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굽어지는 다양한 코너에서도 내비게이션의 타임 랩을 꾸준하게 잡아먹어가며 단축 또 단축을 이어간다. 지금 시간이 2시 50분. 그 팀은 비행기나 탔을까?
에디터/황인상
동네에서 야구깨나 했고, 조금만 더 하면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적어도 동네 야구는 평정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 꿈이 깨진 건 20년도 더 됐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있는지, TV를 켤 때마다 야구중계를 찾기 일쑤였다. 삼성과 롯데의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항상 '큰 틀'에서 야구를 하는, '국민감독' 김인식 감독의 한화가 올라오지 못한 게 서운하기는 했지만, 김인식 감독 다음으로 좋아하는 삼성의 '위풍당당 양신' 양준혁 형님이 있기에 삼성을 응원하기로 했다.
팀원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직접 가서 보는 건 어때'라는 우스개소리가 나왔는데, 철없는 후배들이 직접 보러 가자고 부추기기 시작한다. '야구장에 가봐야 표도 구하기 힘들 것이고, 마땅히 타고 갈 차도 없고 등등'. 이때 튀어나온 말이 '부산 사직야구장을 향한 비행기와 자동차의 결투'였다.
이번 달부터는 몸이 아닌 머리로 쓰는 기사에 전념하자고 몇 번을 당부했건만, 어이가 없다. 또 한판 붙자고 덤벼든다. 비행기와 자동차의 결투.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마티즈를 타고 가건, 599 GTB를 빌리든 황 기자 마음대로 해. 미안해서 그런데, 내가 한 시간 정도 늦게 출발할까?' 그 정도 페널티는 받아야 게임이 되지 않을까?
12시 30분, 3호선 서초역 도착. 여유만만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할 거 다 구경한다. 1시 30분 정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2시 30분 전후의 비행기를 타면 될 것 같았다. 3시 30분 김해공항 도착, 4시 30분 부산 사직야구장에 도착해 사람 구경이나 할 요량이었다. 사실 입장은 꿈도 꾸지 않았다.
부산 야구팬들이 그 시간까지 최윤섭 기자 들어가시라고 표를 가만히 내버려 두겠는가. 여행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니 2시 25분 부산행 대한항공이 있단다. 12시 35분 현재, 비행기표도 남아있다는 정보까지 얻었다. 넉넉하단다.
동대문 역에서 5호선을 갈아탄다. 지하철에서 특별히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꾸벅꾸벅 존다. 그런데 김포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다.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2시 김포공항 도착. 2시 25분 부산행 항공편은 이미 마감. 3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순간 아찔했다. 다시 머리 속 컴퓨터가 시간 계산에 바쁘다. 아무리 빨라도 5시는 되어야 야구장에 도착할 것 같다. 슬쩍 황인상 기자에게 문자를 날린다. '잘 돼?' 시속 100km 이상 달리고 있다면 답 문자를 보내지 못할 것이다.
문자 메시지를 보낸 지 채 30초도 되지 않았는데 전화기에서 문자 메시지 알림 소리가 김포공항이 떠나도록 메아리 친다. '대박 막힘. 용인도 못 갔음.' 왜, 음흉한 미소가 지어지는 걸까?
에디터/최윤섭
3:00 PM - 중부내륙고속도로 하행선 선산휴게소, 비행기 이륙 준비 끝
'달리는 놈, 나는 놈, 그리고 이상한 놈들'
'여보세요? 비행기 탔어요?', '어, 지금 이륙해 끊어.' 지금 탄다고? 비행기는 타면 1시간 아냐? 부산까지 아무리 못해도 2시간 30분은 가야 하는데. 정말 열심히 달려온 탓에 현재 남은 기름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280킬로미터 남짓. 평균연비를 보니 리터당 4.3킬로미터 정도. 주유를 마치고 이번에는 스포츠 모드에서 한번 더 레버를 당겨 수퍼 스포츠 모드를 만든다. SST의 주행 모드 중 서킷용으로 세팅되는 란에보를 느낄 수 있다.
이제 SST의 변속 타이밍은 엔진 한계치까지 끌고 가며 최고출력을 이끌어낸다. 란에보의 행보는 지금껏 과는 완전히 다르다. 드로틀을 최대로 전개하며 드래그 머신 마냥 치고 나간다. 최고속도까지의 도달 능력은 정확한 시간을 재보지 않았지만, 동급의 모델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고속에서 차선변경이나 인터체인지의 급격하게 굽어진 코너를 달려나갈 때면 아스팔트와 끈적하게 하나된 몸짓은 왜 란에보인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3시 30분. 신대구부산간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주유한지 겨우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다시 기름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이다. 수퍼 스포츠 모드에서 사실상 연비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비행기도 아마 비슷한 곳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란에보는 밀양을 지나고 있다. 비행기는 서서히 착륙을 할 시간이다. 최윤섭 기자가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생각해보니, 얼추 비슷하거나 혹은 차가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 어디까지나 이대로 밀고 나갔을 때의 경우다. 그러나 고정식뿐만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동식 카메라와 맞서야 했고, 도로를 꽉 채우고 있는 수많은 생계형 트럭들도 란에보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런 상황에서 란에보를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좀 있다고 생각했기에 SST를 노멀 모드로 바꾸고 부드럽게 란에보를 다그친다.
격렬하게 몇 시간을 달려오다 보니 비명이 줄어든 란에보는 일반적인 세단처럼 엔진이 상승할 무렵에 변속 시키며 D6에서 순항을 이어간다. 빌슈타인과 아이바흐로 조합된 서스펜션도 숨을 고를 때가 됐다. 자! 이제 부산 톨게이트가 보인다.
에디터/황인상
2시 45분. 신문을 두 부나 들고 비행기에 오른다. 이걸 모두 읽고 나면 랜딩기어를 펴지 않을까? 부산까지 말이 1시간이지 이륙하는데 10분, 착륙하는데 10분이고 실제로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은 40분도 되지 않는다. 신문은 온통 금융위기 이야기다. 코스피는 하락하고, 환율은 미친 듯이 오르는 폼이 잘못하면 코스피 지수와 환율 숫자가 같아질지도 모른다는 소식도 있다. '아! 펀드 넣어 놓은 거 진짜 반 토막 나는 거 아니야?' 미리 빼놓을 걸 괜히 미련을 못 버리고 버텼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스스로 위로도 해본다. '아니야, 위기는 곧 기회. 이럴 때일수록 더욱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해.' 공격적인 투자? 통장잔고 30만 원 갖고 무슨 얼어죽을 공격적인 투자. 또 우울하다. 스포츠면에 나와있는 준플레이오프 전망을 보니, 우리 양준혁 형님 팀이 그렇게 유리하지는 않을 것 같단다. '분위기를 제대로 탄, 실로 오랜만에 가을에 야구를 하는 부산갈매기의 상승세를 삼성이 쉽게 막지는 못할 것' 같단다. 신문을 펼친 지 10분 만에 접어버린다.
그나저나 랜서는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제 아무리 달려봐야 아직 대구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고, 야구장에 먼저 도착하면 '김밥에 치킨'으로 배나 채워야 할 것 같다. 차에 타면 운전하고, 조수석에 앉았다면 좀더 빨리 달리라는 말이라도 할 텐데, 진짜 비행기 안에서는 할 게 없다.
그렇다고 조종석으로 기장님을 찾아가 '기장님 좀더 빨리 갈 수는 없을까요? 이 비행기는 마하로 날 수 있나요?'라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조종석 문고리를 잡는 순간 테러범으로 오인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사방을 두리번두리번한다. 해외출장 탓에 비행기야 숱하게 탔지만, 그래도 한국 스튜어디스들이 제일 친절하고 예쁜 것 같다.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손님들을 맞을 뿐 아니라, 짓궂은 손님들도 많을 텐데 절대 미소를 잃지 않는 스튜어디스 누나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항상 서 있어야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음료수를 나눠준다.
'사람들도 참 너무하네. 누나들도 피곤할 텐데.' 한 잔씩 먹으면 되지 멀 그렇게 주문하는 게 많은지. 누나들이 부산스럽게 왔다갔다한다. 그녀들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토마토 주스 한잔을 달래서 바로 '원 샷!' 깔끔하다. 그녀들의 친절함에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다시 꿈나라.
'이 비행기는 곧 김해공항에 착륙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확인해주십시오.'
아직 4시도 되지 않았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왔다. 신문 읽고, 음료수 마시고, 누나들 걱정한 뒤, 이런저런 생각을 위해 잠깐 눈을 감았는데 벌써 부산에 도착하다니....
'어떻게 차가 비행기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회심의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다.
에디터/최윤섭
2008. 11. 8. 4:38 PM - 경부고속도로 부산 톨게이트
'사직야구장을 향해. 마지막 풀 가속, 죽도록 뛰어라'
고속도로 통행료 2만1천900원을 치르고, 부산에 란에보를 올렸다. 4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서울에서 막히지 않았어도 한 시간 정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부터는 길을 모르니 내비게이션에 철저하게 의존해야 한다. 비행기 팀은 '내려서 이것저것 챙기고 버스를 겨우 탔다고 한다.' 거리상으로 보면 사직야구장에서 김해공항보다는 톨게이트가 더 가깝다. 하지만 이제 막 부산에 들어선 란에보보다는 이미 버스를 탄 팀이 먼저 도착할 확률이 높다.
톨게이트부터 막히기 시작하면 애써 달려온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퇴근시간의 러시아워는 아닌 것 같다. 도로는 비교적 한산하다. 동래에 있는 롯데백화점을 앞을 지나자 46억 원을 투자했다는 부산의 새로운 명물 육교가 눈에 띈다. 인터넷에서 신기하다고 느꼈던 것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눈앞에 사직운동장이 보이고 경기장 위로는 다섯 개의 대형 부산갈매기 애드벌룬이 떠 있다. 경기장 주변으로 대형 버스들이 즐비하다. 오직 이날을 위해 모여든 부산 시민들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경기장을 가득 메우며 함성을 질러댄다. 부산이 야구의 도시라더니, 정말 잠실야구장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란에보가 경기장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오후 5시, 아무리 둘러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쯤 입니까?' '넌 어딘데?' '사직야구장.' '알았어, 끊어.' 짜증 섞인 목소린데…, 버스 안인가 보다. 약 15분이 지난 다음에야 그들의 뛰는 모습이 보인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비행기와 자동차와의 대결은 결국 란에보의 승리로 끝났다! 그들도 인정했다. 패인을 분석한 결과, 공항까지 오가는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한 시간이라는 비행시간은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유럽처럼 대륙간을 이동하는 경우에나 자동차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좁은 땅에서 비행기를 이겼다는 것은 어쩌면 란에보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부산의 야구의 도시다. 5시에 도착했지만 입장권은 구경도 못했다. 가끔씩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표 있어요'라고 외치는 암표 장사치들의 유혹이 달콤하긴 했지만 열 배가 넘는 가격이라는 말에 그냥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TV가 있지 않은가.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수석기자는 분이 덜 풀린 듯 다시 한번 레이스를 제안한다. 이번엔 KTX랑 해보자나? 그래? 그가 가진 3시리즈를 걸면 해보겠다고 밀어붙이니 답이 없다. 속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궁금하다. 란에보와 KTX. 체력이 보충될 때 즈음 <톱기어>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개봉박두, 커밍 순'이다.
에디터/황인상
4시. 공항을 빠져 나와 사직야구장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본다. 아직 느긋하다. 공항도 한번 둘러보고 담배도 한 대 피우며 여유로움을 가져본다. 궁금하다. 아니 궁금하기보다는 조금 심심하다. 너무 싱겁게 경기가 끝날 것 같기 때문이다. 심심하면 즐겨야 한다. 약 올리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어디야?' '휴, 아직 멀었어요.' '어디쯤인데?' '내비게이션에 따르면, 사직야구장까지 46킬로미터 남았는데요?'
갑자기 숨이 콱 막힌다. '알았어. 끊어.' 큰일이다. 46킬로미터. 시속 92킬로미터로 달렸을 때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마음이 다급해진다. 사직운동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우선 307번 버스를 탄 다음에, 광혜병원이나 구덕 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갈아 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아저씨 사직야구장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시간 정도 걸리지 않겠어요?' 어디서 갈아타야 잘 했다는 소문이 날까? 고민을 하고 있는 순간, 부산이 고향인 편집장한테서 휴대폰 문자가 날라온다. '광혜병원에 내려서 택시타기 강추.' 다행히도 차는 막히지 않는다. 버스도 부지런히 달리지만 시계초침은 광속인 것 같다. 1분 1초라도 줄여야 한다. 광혜병원에 내리자마자 뛰기 시작한다. 66번 버스로 갈아탄다.
4시 50분이 지나고 있다. 사직야구장에 거의 다다른 것 같다. 사람들과 차들로 북적거린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는걸.' 이 때 '황인상'이라는 글자가 명확히 찍힌 전화가 걸려온다. 불안하다. 혹시? 받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도착했다고 하면, 우리가 먼저 도착했고, 너무 사람이 많은 나머지 찾을 수 없었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지막 벨이 울릴 때쯤에서야 휴대폰을 열었다.
'어디쯤 오셨습니까?' '거의 다 온 것 같아. 너는 어디야?' '....' '어디야? 왜 말을 안 해?' 짜증이 확 밀려온다. 진짜 먼저 도착한 거 아닌가? '엄청나게 큰 부산갈매기가 하늘에 떠 있습니다. 역시 부산은 야구의 도시가 맞는데요. 대단합니다. 이 함성이 들립니까? 부산갈매기~, 부산갈매기~' 아, 이런…. 진짜 갈매기가 되어 도망가고 싶다.
졌다. 깨끗이 패배를 시인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은 벌써 사직야구장 분위기에 흠뻑 취한 것 같다. 통화 후 15분이나 지난 뒤에야 우리는 사직야구장에 도착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필요도 없었다. 파란색 란에보는 그 복잡한 곳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패인? 어차피 공항까지 오가는 시간과 대중교통으로 갈아타는 시간은 예상했던 것이고,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렸던 1시간이 문제였다.
1시간의 공백 동안 란에보는 엄청나게 달렸던 것이다. 만약 지하철에서 내린 뒤 바로 비행기를 탔다면 1시간 이상 앞설 수도 있었을 텐데.... 비행기까지 타고도 차에 졌다고 하면 사무실에서 또 '덤 앤 더머'라고들 할 텐데. 답답하다.
서울 올라오는 길. 삼성이 롯데를 12대3으로 대파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준혁이 형님도 5타수 3안타나 쳤단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입가에 쓴 웃음이 가시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에디터/최윤섭
역시 이노무 기행 잡지. ㄱ-
돈 안새는게 용하다. ㄱ- 누가 이 인간들 좀 말려봐!!!
기사&사진 : 톱기어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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