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가온 인피니티의 한국 공식 론칭. 닛산이 북미 이외의 시장에 인피니티 현지 법인을 설립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4~5년 동안의 급성장이 뒷받침된 결과라고는 해도, 그 이면에는 럭셔리카 시장에서 10여 년 동안 홀대 받아온 인피니티의 집념 그리고 달라진 디자인 정책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ACCD) 임범석 교수가 전하는 인피니티의 무궁한 가능성을, 엔트리 스포츠 세단 G35에 실어 전한다
스튜디오 컷처럼 으레 밝고 화사한 자동차 사진을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지금 이 페이지가 당혹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새카만 어둠 속에 놓인 이 차는 인피니티의 엔트리 스포츠 세단 G35. 인천 영종도의 한적한 해변에서 밤 10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이어진 야간 촬영의 결과물이다. 충분한 조명 장비로 어둠을 밝혔지만, 그래도 칠흑 같은 밤공기에 묻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으리라. 도어 핸들이 어디에 붙었는지, 센터 콘솔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피니티를, 인피니티 디자인의 현재를 좀더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는 숱한 디테일을 오히려 최대한 감춰보기로 했다.
기획 방향이 정리된 뒤부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아트 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는 임범석 교수와 온라인, 국제전화를 통한 대화가 진행되었다. 이번 기획 또한, 실상은 수 차례의 e-메일을 주고받고 전화 상으로 장시간의 대화를 나눈 끝에 얻어낸 영감을 바탕으로 했다.
닛산이 고급차 브랜드인 인피니티를 미국 시장에 선보인 게 1989년이니, 이미 15년 전의 일. 도요타가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역시 럭셔리카 브랜드 렉서스를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일본의 두 럭셔리카 브랜드는 너무 판이한 길을 걸어왔다. 렉서스에게는 달디단 성공의 열매가, 인피니티에게는 쓰디쓴 패배의 독주가 주어졌다. 그러나 인피니티의 행보는 2000년의 3세대 Q45 데뷔를 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2001년 7만1천 여대에 불과하던 북미 판매대수는 지난해 13만 대 이상으로 불어났다. 눈물로 채운 10여 년의 과거를 깨끗이 잊고, 세계 시장으로 눈길을 돌린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현실. 에디터는 지금의 인피니티 성공요인이 달라져도 이만저만 달라지지 않은 디자인(감성)에 있다고 판단했다. 임범석 교수의 설명은, 그 판단이 절반은 꼭 맞고 나머지 절반은 핵심에서 빗나갔다는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1980년대 말 닛산이 미국에 인피니티를 처음 발표하면서 내건 광고 캠페인은, 아마 당시로는 가장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을 겁니다. 그 광고에는 자동차가 한 대도 등장하지 않았어요. 오직 ‘Rocks, Leaves and sand garden…’이라는, 알쏭달쏭한 한 줄의 문장 뿐이었죠. ‘바위, 나뭇잎 그리고 모래 정원….’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에는 일본의 디자인 테마인 ‘젠(ゼ-ン, 禪)’ 사상이 담겨 있거든요. 이 광고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인피니티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성격의 차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죠. 그러나 젠 사상을 접목한 럭셔리 세단은, 어떤 일본 메이커도 꿈꿔보지 못한 매우 과감한 시도였습니다.” 결국 인피니티의 디자인은, 비록 그것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브랜드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미 세계를 겨냥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초창기의 인피니티는, 정말로 잘 팔리지 않았다.
“인피니티의 탄생을 알린 플래그십 세단 Q45는 광고 캠페인만큼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날씬하고 모던한 스타일은 물론이거니와 프런트 마스크에는 라디에이터 그릴 대신 장식적인 요소가 짙은,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큰 엠블럼만 달려있었죠. 그 어떤 세그먼트보다 보수성이 강한 대형 럭셔리 세단에서 전통적인 디자인 요소를 없애버렸으니, 반응이 어땠겠어요. Q45의 생소한 얼굴은 당장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혹자는 미국 시장을 겨냥해 카우보이의 버클을 형상화했다는 억지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죠. 초창기 인피니티의 디자인은, 당시로는 너무 앞선 것이거나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셈이지요. 이유야 어찌 됐건, 인피니티가 시장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임범석 교수의 지적처럼, 인피니티는 북미의 럭셔리카 고객에게 인정 받기까지 고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반면 렉서스는 ‘벤츠보다 잘 만든 복사본’이라는 혹평 속에서도 나날이 판매대수를 늘여갔다. 인피니티는 결국 세간의 지적에 머리를 조아렸고 2세대 Q45부터는 크롬을 입힌 전통적인 방식의 라디에이터 그릴로 앞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인피니티가 컨디션을 완벽히 회복하기까지는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2000년의 신형 Q45를 필두로 근사한 막내 G35와 공격적인 크로스오버카 FX45가 힘을 보탰다. 라인업의 허리를 책임지던 I35와 M45는 올해 초 신형 M35/45에 바통을 넘겼다. 마침내 일본 프리미엄 브랜드로서의 고유 이미지를 완성해낸 것이다. 스타일링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피니티는 디자인, 인테리어, 제작품질, 퍼포먼스 그 어떤 면에서든, 고유색이 분명한 세계적 수준의 럭셔리카 브랜드로 성장했다.
인피니티의 현재에 대해 아직도 미심쩍은 이들을 위해 이번 촬영에 동원된 G35를 예로 들어보자. 앞 오버행은 215/55 사이즈의 타이어에 맞닿을 듯 바짝 당겨졌고 볼륨감이 풍부한 헤드램프가 프런트 윙의 앞쪽을 장식하고 있다. 2천850mm에 이르는 휠베이스와 휠아치를 꽉 채운 17인치 경합금 휠은 공격적이면서도 단단한 자세를 만들어낸다. 실루엣은 깔끔하면서도 과감하고, 간결하게 처리한 윈도 그래픽과 램프도 강인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스타일링의 세련미는 세단보다 쿠페 쪽이 앞선다. 롱 노즈 숏 데크의 늘씬한 차체에 루프라인도, 벨트라인과 트렁크 리드 처리도 모두 한결 매끈하다. 무엇보다 멋진 스타일링을 지니고도 거주 공간을 조금도 해치지 않았다. 2도어 쿠페의 뒷자리에 앉아서 천장에 머리가 닿는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더 이상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G35를 보며 알 수 없는 푸근함이 느껴진다 한들 이상할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된 듯한 아우디나 디자이너의 천국이 되어버린 BMW의 과감한 디자인과는 또 다른 감성. 그 이유를 또렷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해도 그 또한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BWM, 아우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피니티의 독창적인 디자인 세계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동양의 정신이 담겨 있으므로.
“그 동안 일본 자동차 메이커가 고전했던 것은 존재감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이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중차 부문에서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갖췄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제작품질 그리고 신뢰도 면에서 특히 그렇지요. 그러나 디자인이나 프레스티지를 기대하며 일본 차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지나친 일본색 때문에 시장에서 쓴 맛을 본 닛산은 1990년대 말 시로 나카무라라는 숨은 인재를 발굴해내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4도어 세단에만 집중하던 닛산이 트럭 회사로 알려진 이스즈의 디자이너를 영입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어요. 닛산의 모험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둡니다. 시로 나카무라는 디테일을 중요하게 여기던 기존의 일본식 디자인 대신 차체의 비례와 전체적인 모양새를 강조하는 미국식 디자인 기법을 도입하며 닛산 스타일을 완성해갔습니다. 지금의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일본 디자인을 내세우고 있지요. 21세기형 일본 디자인 특성을 일컫는 ‘J 팩터(Japanese factor)’의 등장입니다.”
초대 Q45가 보여주었던 디자인 요소, 이를테면 프런트 노즈의 정교한 세공을 거친 엠블럼이나 최소한의 크롬 장식 등은 모두 젠 사상에 기초한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시로 나카무라의 J 팩터는 공격적이면서도 모던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냉정과 열정이 공존하고 따스함과 차가움이 만나는 접점을 담아낸다.
다시 인피니티의 엔트리 세단 얘기로 돌아가보자. G35의 인테리어는 온통 어두컴컴하다. 검은색 가죽, 검은색의 플라스틱 내장재와 직물소재에 짙은 무늬목 장식이 곁들여진다. 그러나 마냥 어둡기만 한 검은색이 아닌,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미묘한 어둠을 담고 있다. 여기에 응접실의 원목 가구에서 막 떼어내 붙인 듯한 무늬목 트림이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가슴 속에 스미는 온기(혹은 냉기)는, 그러나 오래지않아 금세 폭발할 것 같은 공격성으로 돌변한다. 손바닥 한 가득 차는 스티어링 휠을 움켜쥐고 오렌지색의 계기판에 시야를 고정하는 그때부터 운전자는 뜨거운 피를 지닌 G35의 포로가 된다. 지금의 인피니티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격, 극한까지 뽑아낸 스포티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G35는 이그니션 키를 비트는 순간부터 운전자와의 가식 없는 대화를 시도한다. V6 3.5ℓ엔진의 거친 숨소리도, 왼쪽 엉덩이의 트윈 머플러로 빠져나가는 연소가스의 행로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액셀 페달이 몸에서 멀어질수록 차창 밖 풍경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져 간다. 시속 100km에서 3단 기어로 바꿔달고 150km 무렵까지 정신없이 내달리더니, 4번째 기어가 맞물린 뒤에도 시속 220~230km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고속안정감은 무엇보다 돋보이는 부분. 시속 200km 부근에서의 안정감은 BMW 3시리즈보다 뛰어나고 ‘콰트로 군단’ 아우디도 부럽지 않다.
6천rpm에서 278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V6 엔진은 이를 아랑곳 않고 타코미터의 붉은 바늘을 6천600~6천700rpm까지 올려 붙인다. 5천500rpm까지는 두터운 토크를 이끌어내고 그 이상, 그 이하에서도 힘이 넘쳐흐른다. “Moments that take your breath away”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건만, 결국 시승이 다 끝나 갈 때까지도 G35의 불규칙적이면서도 빠른 템포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G35 쿠페는 딱딱하고, 불편하다. 노면의 작은 굴곡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자세가 순간적으로 뒤틀리기 십상이다. 스티어링 휠은 대형 보일러실의 꽉 잠긴 밸브처럼 처음에는 무겁다가 이내 헐거워진다. 반면 G35 세단은 훨씬 세련됐고 안락하다. 핸들링은 강력하고 안정적이며, 서스펜션은 노면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면서도 승차감을 놓치지 않는다.
G35 세단이라고 모든 면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포악한 성능 탓에 운전하는 내내 긴장을 놓칠 수 없고, 운전자세가 높은 시트도 썩 편안하지는 않다. 5인승 인테리어 구성은 사실상 4인승에 가깝고, 기어 레버에 가려져있는 비상등은 긴급한 상황 때 오히려 ‘비상 사태’를 초래하는 원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차에는 컴팩트 세단이 누릴 수 있는 최상급의 퍼포먼스가 모두 담겨있다. 이런 차를 라이벌의 엔트리 버전 수준인 4천990만 원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이 급 시장의 고객에게 대단한 행운이다.
“이제 시대도, 인피니티도 변했습니다. 지금의 인피니티는 스포티하고 럭셔리해지고 싶은 어떤 자동차 메이커라도 탐을 낼 만한 아주 뛰어난 디자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해가 빠른 사람이라면, 임범석 교수의 마지막 설명이 비단 시로 나카무라의 디자인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님을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글 | 김형준 사진 | 최대일
Specification : Infiniti G35 sedan Price 4,990만 원 Tech V6 3498cc, 272마력/6000rpm, 36.0kg·m/4800rpm, 9.0km/ℓ
Performance 0→시속 100km 가속 n/a, 최고시속 n/a Transmission 5단 자동, 뒷바퀴굴림 Weight 1,590kg
기사&사진 제공 : 탑기어 2005년 8월호(http://www.topgearkore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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