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정부의 지원으로 프로토타입 국민차 3대를 개발한 포르쉐는 주행 테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양산준비를 시작했다. 1938년 5월 26일, 폴크스바겐시에서는 공장 건설을 위한 기공식이 열렸다. 하지만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이 공장은 군수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포르쉐가 개발한 국민차는 2차대전이 끝난 후에야 비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1875∼1951)
히틀러에게 인사를 드린다고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다임러의 중역과 유명한 카레이서 한스 슈트크와 함께 히틀러를 방문한 것은 1933년 5월이었다. 그가 히틀러를 만나는 것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9년 전에 자동차 레이스장에서 다임러의 레이스카를 개발했던 그가 자동차 경주를 보러 왔던 히틀러에게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전 일이라서 히틀러는 그를 잊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스를 좋아했던 히틀러는 세 사람이 방에 들어서자, 먼저 슈트크를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포르쉐를 보자, 잠시 뚫어질 듯 응시하더니, “야아, 포르쉐씨 아니요? 이것 반갑습니다”하고 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다임러 벤츠를 그만두고 나와서 아들 페리와 함께 슈투트가르트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어요.”
“이젠 자동차 개발은 하지 않고?”
“계속하고 있어요. 지금은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국민을 위한 차, 값이 비싸지 않아 누구나 살 수 있으면서 성능이 보통 승용차에 비해 뒤지지 않는 것을 개발하기 위해 설계를 하는 중입니다.”
“호호오, 내가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인데…….”
그 해 2월 11일, 히틀러는 베를린 모터쇼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자동차가 부자들만의 것이 되면 그것은 국민을 둘로 가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국가를 진정으로 떠받치고 있는 국민 대중을 위한 자동차가 나와야 그것은 비로소 문명의 이기가 되며, 국민 모두가 멋진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국민을 위한 차’를 개발해야 합니다.”
이때 벌써 히틀러는 ‘폴크스바겐’, 즉 국민차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쉐, 정부 지원으로 프로토타입 국민차 개발
히틀러는 포르쉐에게 그가 지금 구상하고 있는 차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포르쉐를 지원해 주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이것이 포르쉐가 폭스바겐의 비틀을 탄생시키게 되는 시작이었다.
1934년 1월, 새로운 대중차에 관한 그의 구상을 발표했다.
“내가 생각하는 대중차는 종래의 승용차를 치수와 중량, 마력을 줄이기만 한 차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승차감이 나빠지고 수명이 짧아져서 승용차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거기에 안전성도 충분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가치가 떨어지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말하는 승용차란, 종래의 차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해결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구상을 나타내는 4월 27일자 아이디어 스케치를 근거로 정부가 운영하는 독일제국자동차산업연맹(RDA)과 포르쉐설계사무소는 계약을 맺었다. 매월 2만 마르크를 지원 받아 10개월 이내에 3대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해 납품하기로 한 것이다.
엔진을 뒤에 싣는 뒷바퀴굴림차는 폭스바겐이 처음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애용하며 정치선전에 100만km 이상 다녔던 차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타트라자동차회사의 타트라Ⅱ였다. 그 차를 개발한 주임기사 한스 레드원카를 히틀러가 좋아해 모터쇼에 갔을 때마다 타트라사의 부스로 찾아가서 그를 만나 새로 개발하는 차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타트라Ⅱ는 1923년부터 양산되었으며, 공랭 수평대향 2기통 1.1X 엔진을 가진 차였다. 타트라사는 레드윈카가 새로 개발한 최초의 뒷바퀴굴림차 타트라77을 1934년부터 발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공랭 90° V8 3.0X 엔진을 뒤에 얹고 앞쪽에 트렁크를 가진 차였다. 레드윈카는 이 차를 프레임 없이 차체 바닥 가운데를 불룩 튀어나오게 해 강도를 가지게 하는 백본(back-bone) 프레임방식으로 모노코크를 만들었다. 그 엔진은 3천500rpm에서 60마력을 내서 시속 150km로 달렸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차였다.
히틀러는 레드윈카를 총통 관저로 불러 공랭식 엔진과 소형차에 관해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히틀러가 공랭식 엔진을 가진 국민차를 대량생산해 그가 만든 아우토반을 그것으로 가득 채울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체코 기술자 레드윈카 때문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포르쉐가 개발한 차는 이 차와 같은 개념을 가진 차로, 승차감을 더 좋게 하기 위해 그가 특허를 획득한 토션바 서스펜션을 채용했다.
1936년, 포르쉐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국민차의 테스트 주행이 행해졌다. 세 가지 프로토타입이 RDA와 슈투트가르트대학, 베를린대학에서 5만km의 주행시험에 들어가 테스트가 끝나자 그 중 차 한대는 오버잘츠브르흐 여름별장에 체재중인 히틀러에게 보내졌다. 히틀러는 기쁜 얼굴로 그 차를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그 차를 몰고 온 엔지니어에게 잘 만들었다고 크게 칭찬해 주었다.
RDA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포르쉐와 계약을 맺기는 했어도 1천 마르크 이하로 만드는 차가 제대로 된 차일 수 없다고 믿고 히틀러의 국민차 실현을 믿지 못하고 있었는데, 테스트한 결과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목표하는 차의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5만km의 주행시험은 성공했습니다. 이 자동차는 눈부신 성능을 보였으며 앞으로의 개발을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제출했다.
포르쉐는 그 차의 실용화를 위해 계속 시험하고 개조하기 시작했다. 물자가 그리 흔한 때가 아니었지만 정부는 그가 원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공급해 주고 자금도 뒷받침해 주었다.
2차대전으로 국민차생산 무산, 비틀로 재 탄생
그는 그 차를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는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과 뛰어난 노동력이 필요하니 정부가 지원해 달라고 나섰다. 그는 미국의 포드를 모범으로 하는 새 회사를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해 포드를 방문해 헨리 포드와 대담도 하고 공장도 샅샅이 견학했다. 그리고 독일계 미국인 기술자를 포드에서 20명이나 초청해 채용하고는 제조공정 준비를 시켰다. 미국의 앞선 생산기술을 도입해 세계 최고의 공장을 세우겠다는 야심은 포르쉐와 히틀러 두 사람 공통의 것이었다.
포르쉐는 같이 일하게 된 동료 레드윈카와 함께 공장 후보지를 찾아 다녔다. 공장 주변에 새로운 주택도시를 만들어 사원들을 살게 하고 싶다는 것이 히틀러의 희망이었다. 한 공장에서 월간 1천여 대의 차를 만들어 내려면 수천 명의 작업자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일 북쪽 지방 니더작센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걸맞는 땅을 발견했다. 독초와 작은 늪이 많은 농지였는데, 그것은 베르너 폰 슈렌베르크 백작 소유의 것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땅을 팔라고 했을 때 거절할 수가 없었다.
1938년 5월 26일, 폴크스바겐시(Wolfsburg, 현재는 볼프스부르크시)라고 명명된 도시와 공장 건설을 위한 기공식이 7만여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렸다. 히틀러가 초석(礎石)을 놓는 행사를 직접 행하고 나서 그 특유한 연설을 했다.
“독일 국민의 이름으로 여기에 초석을 놓습니다. 이 공장은 전체 독일 국민의 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독일 국민의 행복에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이라 히틀러가 이름 지은 차를 생산할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공장이 아직 완공도 되기 전인 1939년 봄에 KdF 바겐은 베를린 모터쇼에서 선을 보였지만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으로 공장 건설은 전부 중단되고 말았다. 설치를 준비하던 기계는 모두 창고에 들어가고 독일판 군용 지프, 큐벨바겐의 생산공장으로 전환했다. 우수한 기능공으로 채우려던 공장에는 강제수용소에서 데려온 유태인으로 가득찼다.
히틀러의 광대한 꿈은 악몽으로 변하고 말았다. 전세가 역전되어 바르샤바가 소련군에 점령당하고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얄타에서 회담하며 히틀러가 없는 유럽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를 협의하고 있었다. 1945년 봄, 히틀러는 동부전선을 찾아가 사기를 높이려고 기를 썼지만 독일은 패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는 전속운전사 에리히 켐프커가 모는 개량된 KdF 바겐을 타고 마지막으로 동부전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차 전방에는 전쟁물자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가 만든 아우토반의 끝이었다. 그는 아우토반을 모스크바까지 연장시켜 독일제국의 간선도로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하나의 허망한 꿈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동부로 갔다 돌아 온 6주 뒤인 5월초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는 지하호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두 사람의 시체에는 전속운전사 켐프커가 준비한 휘발유가 부어져 소각되었다. 포르쉐는 프랑스로 떠나 그 곳에서 체포되어 얼마동안 수감되었지만 1947년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수감된 동안, 자신이 원했던 스포츠카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포르쉐 911입니다. 또한 르노 4CV를 직접 디자인했고요.)
포르쉐가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 개발한 국민차 KdF 바겐. 2차대전이 끝난 후 비틀로 이름이 바뀌어 생산되기 시작했다
히틀러와 포르쉐의 꿈이었던 KdF 바겐은 2차대전 후, 폭스바겐의 대표차 비틀로 명칭이 바뀌어 생산되어 전 유럽과 미국에 수출되면서 서독을 부흥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고, 그 성공이 나중에는 일본을 자극해 미국과 일본간에 자동차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기사&사진 출처 : 자동차생활 2005년 2월호(http://www.carlif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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