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사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품질을 인정받는 차다. 50년대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만들던 기아산업은 62년부터 삼륜차를 생산 완성차시장에 뛰어들었다. 그 뒤 12년이 지난 74년 기아는 처음으로 소형승용차 브리사1000을 내놓았다.
이 차는 당시 메이커들이 대부분 외국차를 들여와 조립 생산하던 시기에 국내 기술이 대폭 적용된 국산화 모델이란 점에서 의미가 컸다. 기아는 이 차를 계기로 본격적인 자동차메이커로서 자리를 굳히게 됐다. 브리사의 원형 모델은 일본 마쓰다의 파밀리아 이다.
기아가 생산한 브리사는 70년에 모델 체인지 된 마쓰다 파밀리아 프레스토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기아 브리사는 길이/너비/높이가 3,875mm/1,540mm/1,399mm로 지금의 아벨라 정도의 크기였고 985cc 4기통 엔진을 얹었다. 무게는 790kg, 뒷바퀴 굴림 방식에 수동 4단변속기를 장착했다. 최고출력은 62마력, 최고시속은 140km를 낼 수 있었다.
브리사는 값이 159만9,000원으로 당시 승용차 중 싼 편이었고 연비도 리터당 23km로 ‘하루 유지비 2,000원’의 경제형 승용차로 주목받았다. 이 차는 탁월한 경제성과 야무진 성능을 바탕으로 75년 한해 동안 모두 1만202대를 생산하여 승용차시장의 58.4%를 차지하며 단숨에 베스트 셀링 카로 뛰어올랐다. 이 무렵 서울시내 자동차대수는 총 8만여 대로 자가용이 5만대 정도, 영업용 2만8,000여대, 관용 3,200여대였음을 감안하면 브리사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브리사는 그 뒤 K-303,왜건, 브리사Ⅱ 등으로 이어지며 83년까지 모두 3만1,017대가 팔려나갔다. 브리사는 생산 첫해부터 국산화율 65%를 기록, 75년에는 80%를 국산화했다. 브리사는 국산차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준 차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현대자동차는 해방직후인 46년 설립된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정비공장이 그 뿌리다. 이 회사는 해방 전까지 자동차정비업으로 사업기반을 잡았던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세운 발판이었다.
현대자동차가 첫 차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코티나`다. 67년 현대는 포드와 손을 잡고 신진의 코로나와 경쟁할 수 있는 영국 포드 제품인 1,600cc급 `코티나`를 첫 작품으로 국내에 선보였다. 코티나는 길이/너비/높이가 4,267mm/1,648mm/1,389mm였고 뒷바퀴 굴림 방식의 차였다. 이 차는 배기량 1,598cc 직렬 4기통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75마력, 최고시속 160km의 성능을 냈다. 이 차는 당시 국내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신진 코로나보다 차체가 커 실내공간이 여유 있었고 배기량이 더 커 힘도 좋았다. 현대는 1년 만에 5,000대를 생산, 10억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값은 코로나보다 20만원 비싼 110만원이었으나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런데 69년 9월 영・호남 지역의 대 홍수 때 침수된 부품으로 조립한 차들이 말썽을 일으켰다. 70년대 중반부터 무더기 차 반납 소동이 일어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코티나의 잦은 고장은 한 때 ‘섰다하면 코티나’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등의 헐뜯는 별명으로 현대의 자동차산업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현대는 71년부터 코티나의 품질향상에 주력하여 새 모델인 뉴 코티나를 선보였다. 이 차로 다시 인기를 회복한 뉴 코티나는 76년까지 픽업, 밴, 왜건 모델 등으로 가지치기하면서 2만3,141대가 팔렸다. 71년 이전에 생산된 코티나 까지 포함하면 모두 3만1,450대가 팔렸다.
아시아자동차는 65년 7월 호남의 사업가 이문환 씨가 처음에는 트럭과 버스 등 상용차와 승용차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했다. 아시아는 이태리의 피아트자동차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피아트의 소형 승용차인 피아트124를 조립 생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피아트의 차관 거절로 아시아는 공장을 지은 지 1년도 못돼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69년 말 동국제강에 경영권을 넘겨줬다. 동국제강은 70년 1월부터 아시아가 계획했던 피아트124와 버스를 생산했다.
피아트124는 피아트가 66년 개발한 모델이다. 이 차는 유럽에서도 인기를 모아 유럽 최우수차로 뽑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피아트124는 배기량 1,197cc 엔진과 최고출력 65마력, 최고시속 145km를 냈다. 이 차는 차체길이/너비/높이가 4,042mm/1,625mm/1,420mm로 작은 편이었으나 실내 공간은 넓었다. 무게는 885kg에 뒷바퀴 굴림 방식이었다.
이 차는 네모난 직선형의 전형적인 박스 카로 앞뒤 범퍼와 휠, 도어 손잡이 등을 스테인리스로 만들었고 휠 하우스, 창틀, 사이드미러 등에 크롬몰딩을 둘렀다. 사이드미러는 운전석 쪽에 하나만 붙여 놓았었다. 요즘에 이런 차를 본다면 촌스럽다고 하겠지만 당시로는 ‘번쩍거리는’ 고급 소형차였다.
피아트124의 특징은 외형보다 소리에 있었다. 수냉식 엔진이면서도 ‘부두두둥’ 하는 공랭식 엔진 같은 배기 음을 냈다. 이 배기 음 때문에 오토바이 차라고 놀림도 받았지만 특히 엔진 냉각성과 내구성이 좋아 지칠 줄 모르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달린다 하여 경부고속도로의 승냥이라는 별명도 얻었던 피아트만의 개성으로 지금도 그 소리 때문에 피아트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피아트124는 73년 4월 피아트와 생산계약이 중단되면서 단종 되고 말았다. 이 때까지 팔린 피아트124는 모두 6,800여대. 76년 아시아를 인수한 기아산업이 79년 피아트132를 들여와 생산한 것도 이 차의 신뢰성이 계기가 된 것이었다.
최초의 양산 국산차인 새나라를 본 뜬 신성호로 재미를 못 본 신진자동차는 65년 11월 파산상태에 빠진 새나라자동차를 인수, 신진자동차공업(주)로 급성장했다. 신진은 다음해 7월 새 차종인 코로나를 생산, 국내 자동차산업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코로나는 일본 도요타가 57년 처음 선보인 소형 승용차로 신진이 수입한 모델은 3세대인 RT40형이었다. 차체는 길이/너비/높이가 4,085mm/1,550mm/1,420mm 크기에 배기량 1,492cc 4기통 엔진을 얹었다. 성능은 최고출력 72마력으로 시속 145km까지 낼 수 있어 그때까지 나온 국산차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가진 차였다.
차 값은 83만7,000원으로 당시 대통령 월급이 7만8,000원, 쇠고기 한 근 200원, 택시 기본요금 60원 다방커피 40원이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비쌌는지 알 수 있다. 66년 7월부터 판매를 시작한 코로나는 그해 3,600대, 67년 5,000대, 68년, 1만1,000대, 69년 1만3,000대가 팔려 나가 신진자동차를 돈방석에 올려 주었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사장은 자동차사업 시작한 지 10년 만에 자동차재벌로 떠올랐다 그러나 71년 도요타자동차와의 기술제휴 5년 계약이 끝나자 재개약을 하지 않고 거래를 끊어버렸다. 당시 중공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는 물론 그 나라와 통상관계가 있는 나라까지 교류하지 않겠다는 ‘주은래 4원칙’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진출 야망을 가지고 있던 도요타가 재빨리 태도를 바꾼 것이다. 신진은 결국 코로나뿐 아니라 도요타와 제휴해 만들었던 퍼블리카, 크라운 등의 생산도 모두 중단하게 됐고 회사가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코로나는 70년에 선보인 페이스리프트 모델 ‘뉴 코로나70’을 포함 72년 11월까지 4만6,000여대를 만들어 팔았다. 60년대 최고 인기차종이었던 코로나는 국내 자동차산업에 활력을 불어 넣었으나 외국 메이커에 의존한 기술은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기사&사진 제공 : 글로벌 오토뉴스(http://global-auto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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