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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모터 스포츠

늦게나마 타카하시 쿠니미츠 감독님의 부고 1주기에 부쳐

지난 2022년 3월 16일, 일본 모터스포츠계는 큰 별을 잃었습니다. 2륜과 4륜에서 전설적인 드라이버로 군림해오던 타카하시 쿠니미츠(高橋国光)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일본 모터스포츠계의 레전드 드라이버인 고인을 기리면서, 1년전, 독일인으로서 일본 모터스포츠 소식에 정통한 저널리스트인 geinou님이 직접 저술한 고인의 이력에 대해 알리고자 합니다. 비루한 번역 능력과 번역기를 많이 돌린 편으로 인하여 원문을 얼마나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번 원문과 대조하여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geinou님의 원문은 아래의 링크로 가시면 됩니다. 본 글은 geinou님의 승인을 받아 번역된 글임을 다시 알려드립니다.

OBITUARY: KUNIMITSU TAKAHASHI (1940-2022)

 

Obituary: Kunimitsu Takahashi (1940-2022) – Racing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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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 타카하시 쿠니미츠(1940~2022)

일본 모터스포츠 세계는 큰 영웅 1인을 잃었다: 2륜과 4륜 레이싱의 전설적인 선구자, 타카하시 쿠니미츠가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묻든지 간에: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일본 모터스포츠 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그를 찬양하거나 업적을 기리는 이름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진정한 선구자. 진정한 전설. 그랑프리 우승자. 팀 오너. 챔피언. 르망 우승자. 포물러 1 드라이버. 슈퍼 GT의 첫번째 수장. 드리프트[각주:1]의 아버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일본 모터스포츠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인의 선수 경력은 1958년, 그가 350cc의 바이크를 타고 아사마 산[각주:2] 주변을 도는 전일본 모터사이클 클럽맨 레이스 대회[각주:3]에서 우승하면서 시작되었다. 1년 후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업적을 이뤄냈지만, 이번에는 500cc 바이크를 사용했다.[각주:4] 자신의 재능에 놀라서 기뻐하면서,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혼다 R&D 주식회사[각주:5]의 혼다 스피드 클럽(Honda Speed Club, HSC)[각주:6]에 가입하고서 국제적인 경쟁에 나서게 되었다. 1년 후 그는 호켄하임링에서 열린 서독 그랑프리 경주[각주:7]에서 250cc 바이크로 우승한 첫 일본인 선수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당시 개원한 타마텍의 초대 소장에 취임했다.[각주:8] 1962년 맨섬 TT에서 치명적 부상을 당하고 1964년에 자동차 경주 선수로 전업하기 전까지 그는 3번 우승했고 14번 시상대에 올랐다. 

그의 친구들과 팬들에게 "쿠니상(Kuni-san, 国さん)"이라고도 불린 그는 닛산과 닛산의 직업팀인 옷파마 웍스와 계약을 맺어 최고의 스포츠카 드라이버들 중 1명으로 부상했다. 1966년 스즈카 1000km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이듬해인 1967년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일본 그랑프리[각주:9]에서 2위에 오른 것을 계기로 자신이 2륜에서만 빠른 것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보여줬다. 1960년대에 그는 전설적인 경주차인 R380과 같은 프로토타입부터 개조된 양산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의 자동차를 운전했다. 1972년 닛산 스카이라인 GT-R 계보에서 1세대에 해당하는 닛산 스카이라인 2000 GT-R이 50연승을 달성했을 당시, 그는 폭우속의 후지 300km 레이스[각주:10]에서 "하코스카"를 운전하며 그 자리를 지켰다.[각주:11] 그는 드라이버 동료인 키타노 모토(Moto Kitano, 北野元)와 쿠로사와 모토하루(Motoharu Kurosawa, 黒澤元治)와 함께 <옷파마 워크스의 삼익 까마귀(追浜ワークス三羽ガラス)>, <옷파마 워크스의 삼두정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년의 후지 1000km, 1971년의 레이스 드 닛폰 6시간, 1973년의 스즈카 1000km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등 획기적이면서 기록적인 승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무관의 제왕"로 불리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종종 폴 포지션에 오르고, 서킷에서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을지라도, 왜 그가 뛰어난 선수였는지를 보여줬으나 궁극적으로는 차량의 트러블로 인해서 레이스에서 제대로 나설 수 없었던 몇몇가지 경기 때문이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쿠니상은 그의 순수한 스피드 말고도 그의 독특한 운전 기술 때문에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종종 네바퀴를 코너로 몰아넣고 드리프트를 했는데, 이 주행기술은 나중에 "드리프트 킹(Drift King)" 츠치야 케이이치에 의해 대중화 되면서 하나의 모터스포츠 경기로 이어졌고, 타카하시 쿠니미츠에게 "드리프트의 아버지(The Father of Drift)"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1975년, 고인은 전일본 포뮬러 2000 챔피언십[각주:12]에 참전하면서 싱글 시트 레이스에 데뷔했다. 2년 뒤인 1977년에는 호시노 카즈요시[각주:13]에 이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각주:14] 그러나 그해 3월 6일 스즈카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타케시타 켄이치(竹下憲一)가 백스트레이트 구간에서 연속으로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대형사고로 그 사이에 끼였을 때 그는 스포츠와 동료들에 대한 진정한 헌신을 보여줬다. 당시 레이스에서 선두로 주행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두번 다시 생각하지 않고 즉시 사고 현장에 멈춰서 타케시타를 구하러 왔고, 이를 본 다른 드라이버들도 그에 동조하여 타케시타를 구하러 갔다. 레이스는 최종적으로 레드 플래그로 중지, 그 직전의 순위가 공식 결과가 된 고로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이 경기에서 시즌 첫 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다른 드라이버들이나 주최자, 팬들에게 높은 찬사를 얻은 건, 도움이 필요한 다른 드라이버를 돕는 그의 헌신과 이타심이었다. 그가 포뮬러 레이스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1978년 JAF 그랑프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리카르도 패트레스(Riccardo Patrese)[각주:15], 데릭 워릭(Derek Warwick)[각주:16], 르네 아르누(René Arnoux)[각주:17]를 이기고 그해 전일본 F2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의 왕관과도 같은 경기에서 우승, 썩 좋지 못했던 "무관의 제왕"이라는 꼬리표를 떼내는데 성공했다. 1년 전,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 그랑프리 레이스에 나서서 메이리쓰 레이싱팀의 프라이비터 티렐 007[각주:18]로 9위를 기록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마샬인 유아사 켄고와 사진작가인 오오하시 카즈히로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가려졌다.[각주:19]

타카하시 쿠니미츠의 싱글 시트 레이스 커리어는 1975년부터 1994년까지, F2000, F2, F3000에 참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는 총 4회의 경주에서 우승하고, 17번 시상대에 올랐다. 1994년 10월, 그는 54세의 나이로 싱글 시트 커리어 사상 마지막으로 시상대에 올랐을 때[각주:20]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전일본 내구 챔피언십[각주:21]과 전일본 스포츠 프로토타입카 내구 챔피언십(JSPC)[각주:22]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룹 C 프로토타입 차량의 시대가 한창일 때 그는 노바 엔지니어링의 어드반[각주:23]-포르쉐 956과 962C를 타면서 3연패를 차지했고, 1989년에는 4번째 챔피언을 추가했다. 쿠니상은 1984년, 1985년, 1989년 스즈카 1000km에서 3번의 우승과 1986년 후지 1000km에서 또 다른 우승을 차지했다.[각주:24] - 이 일본에서 가장 큰 두 대회는 오늘날 스즈카 10시간과 WEC의 후지 6시간으로 궁극적으로 변화되었다.[각주:25] 이와 동시에 고인은 미쓰비시 스타리온[각주:26]으로 그룹 A 투어링카 레이스에 참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전일본 투어링카 챔피언십에서 3회의 우승과 6회의 포디엄 피니시를 거뒀다.

그가 일본에서 그룹 C 차량으로 거둔 성적은 당연히 그를 이 부분에서 가장 위대한 스포츠카 대회인 르망 24시로 이끌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Kremer Racing과 손잡고 포르쉐 962C 및 962CK 모델로 참가한 고인은 1988년 출장한 대회에서 같은 일본 드라이버인 오카다 히데키와 9위에 오르면서 단 한번만 탑 10위 안에 들 수 있었다. 다른 기간동안 그는 불운하게도 체커 플래그를 받지는 못했으나 그 덕분에 1989년 레이스에서 일어난 위험한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1992년 팀 쿠니미츠가 전일본 투어링카 챔피언십 참전을 위해 창단되었다. 그는 그의 좋은 친구이자 큰 숭배자인 츠치야 케이이치를 기용해 가장 강력한 닛산 스카이라인 GT-R R32로 참가했다. 1994년 그들은 팀 쿠니미츠 명의로 새롭게 만들어진 전일본 그랜드 투어링카 챔피언십(JGTC), 오늘날 슈퍼 GT의 전신인 이 대회에 참전했다. 이 듀오는 그해 시즌에 스포츠랜드 스고에서 포르쉐 911 RSR로 첫 승리를 거뒀다.[각주:27]

같은해, 타카하시의 경력은 혼다와 손잡고 Kremer Racing의 혼다 NSX GT2를 가지고 르망에 복귀했을 때 완전히 순환궤도에 올랐다. 혼다는 이 차량의 데뷔 과정에서 체커기를 볼 수 있는 순간까지 츠치야 케이이치, 이이다 아키라를 비롯한 순수한 일본인 라인업으로 팀을 구성했다. 그들의 가장 큰 승리는 1년 뒤에 일어났다. 혼다는 이해 3대를 출장시켰고, 팀 쿠니미츠는 유일한 LMGT2[각주:28] 사양의 혼다 NSX GT2로 유럽에 갔다. 마지막 순간, 그들은 차량 트러블로 인해 6바퀴를 피트 내에서 보내야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포기하기 위해 프랑스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천천히 다른 차들을 추월해 나갔고 심지어 밤에 위험한 빗길 상황도 무시하면서 달린 결과, 결국 아침에 Callaway Corvettes으로부터 선두를 빼앗아왔다. 세키야 마사노리[각주:29]가 일본 최초의 르망 24시간 종합 우승자로 떠오른 기념비적인 그 날, 이는 제조사로서 혼다의 첫 승리일 뿐 아니라, 타카하시, 츠치야, 이이다의 첫 승리이기도 하다. 이 업적으로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2013년 르망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 트리오는 1996년 사르트에 다시 나타나서 LMGT2 클래스에서 3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슈퍼 GT에서 파트너십을 맺고있는 스탠리 전기의 자동차 조명 브랜드였던 레이브릭[각주:30]이 쿠니미츠의 차량을 후원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주목할만하다.

팀 쿠니미츠는 혼다의 첫 GT500 팩토리 프로그램으로 나서는 팀이 되었다. 1997년 데뷔한 이 팀의 파란색 레이브릭 NSX-GT는 처음부터 문크래프트[각주:31]에 의해 제작되었고, 빠르게 역대 JGTC/슈퍼 GT에서 가장 인지도 있고 상징적인 디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98년 고인은 혼다의 유일한 세번째 우승을 미네 서킷[각주:32]에서 차지했다. 59세가 된 해, 쿠니상은 골든 위크 라운드로 열리던 후지 300km[각주:33]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뒀고 그해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2012년에는 72세의 나이로 후지 스프린트컵 레전드 컵에 참가하여 세키야 마사노리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등 작은 대회에도 참가했다. 2019년, 네덜란드 아센에서 열린 모토GP 행사에서 쿠니상은 혼다의 그랑프리 경주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 1바퀴를 직접 달렸다. 이것이야 말로 기억에 남고 소름돋을 순간이다.[각주:34]

치열한 경쟁에서 물러난 뒤에도 고인은 자신의 팀을 관리하는 것에만 집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1993년 JGTC가 성립되고 2005년에 슈퍼 GT로 브랜드를 바꾼 이후인 2007년, 반도 마사아키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기기 전까지 GT 어소시에이션(GT Association, GTA)[각주:35]의 회장직을 계속 맡았다. 또한 그는 일본 자동차연맹(JAF)과 일본 모터사이클 연맹(MFJ)의 이사를 역임했다. 다수의 경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GT500의 우승 타이틀은 항상 교묘하게 쿠니상을 피해갔다. 2018년에 포뮬러 1 챔피언 출신인 젠슨 버튼이 팀에 합류하여 야마모토 나오키[각주:36]와 콤비를 이루면서, 긴 기다림은 끝이 났고, 2010년 이후[각주:37] 처음으로 혼다의 GT500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토요타의 톰즈 군단을 상대로 치열한 대결에서 승리를 거뒀다. 2019년 시즌 종료 후, 버튼이 슈퍼 GT 시즌을 극적으로 마무리한 후, 야마모토 나오키는 새로운 팀 동료 마키노 타다스케[각주:38]와 함께 2020년에 팀 쿠니미츠를 3년만에 두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2021년 야마모토는 혼다가 키우는 젊은 드라이버이자 당시 GT300 드라이버였던 사토 렌에게 충돌을 당하기 전까지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는 중에 이 사고로 시즌을 극적으로 마무리 지었다.[각주:39]

고인은 일본의 스포츠 진흥에 대한 탁월한 공헌을 인정받아 일본 문부과학성(MEXT[각주:40])으로부터 표창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카토 다이지로, 아오야마 히로시, 후지나미 타카히사에 이어 모터사이클 라이더로서는 4번째이며 자동차 경주로서는 첫번째 수상자였다.[각주:41] 2020년 7월 도쿄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고인은 자신에게 세계 무대에 진출할 기회를 준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를 만난 행운에 대해 회상했다. 겸손한 말로 고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터스포츠는 2륜이든 4륜이든 많은 사람의 노력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제가 제 인생의 60년 이상을 레이싱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분들 덕분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입니다."

82세의 나이로 고인은 생의 마지막 레이스를 완주했다. 그의 많은 공헌이 없었다면 일본 모터스포츠의 세계는 예전과 달랐을지도 모른다.레이싱계는 진정한 전설을 잃었다. 진정한 선구자. 자신의 인생을 이륜과 사륜 모터스포츠에 헌신한 그 남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하도록 영감을 줬다. 1993년, 모터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쿠마쿠라 시게하루[각주:42]는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열리던 인터TEC 투어링카 레이스의 TV 중계 해설 도중 고인의 능력을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천재야!"[각주:43]라는 간단한 말로 높게 평가했다. 고인의 가족과 모든 친구들, 그리고 물론 팀 쿠니미츠의 모든 직원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평화롭게 달리시길. 쿠니상.

사진 저작권 : 혼다, 닛산, 모빌리티랜드, GT 어소시에이션, 문부과학성




  1. 여기서는 드리프트 주행을 말한다 [본문으로]
  2. 나가노현과 군마현 사이에 위치한 화산이다. [본문으로]
  3. 원문에서는 전일본 모터사이클 내구레이스에서 우승했다고 했으나, 1958년에 열린 이 대회는 아마추어 라이더가 참여하는 대회였다. 즉 당시 기준으로 모터사이클 메이커와 계약한 라이더는 참전할 수 없는 대회가 이 대회였다. [본문으로]
  4. 당시 규정상 350cc는 주니어 클래스, 500cc는 시니어 클래스였는데,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2년간 클럽맨 레이스 대회 양 클래스에서 모두 우승했고, 심지어 바로 다음날 열린 제3회 내구 로드레이스에서 2위를 기록했다. [본문으로]
  5. 혼다기술연구소 주식회사, 혼다기연공업의 계열사다. [본문으로]
  6. 현재 혼다 레이싱(HRC)의 정신적 모체 [본문으로]
  7. 현재 모토GP 월드 챔피언십 중 독일 그랑프리는 작센링에서 열리고 있다. [본문으로]
  8. 다만 실제로는 명예직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9. 당시 일본 그랑프리는 스포츠카 및 투어링카 레이스 대회로 열렸다. [본문으로]
  10. 공식명칭 : '72 후지 GC 시리즈 No1 후지 300km 스피드 레이스 [본문으로]
  11. 당시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다른 차들을 압도적으로 따돌리며 1위를 차지했다. [본문으로]
  12. 현재의 슈퍼 포뮬러로 이어지는 일본 톱 포뮬러 대회의 시작이 되는 대회 [본문으로]
  13. '일본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라 불린 드라이버. 1947년 시즈오카 출신으로 1983년 자신의 이름을 건 레이싱팀인 호시노 레이싱을 창단했다. 2023년 현재 호시노 레이싱의 팀인 팀 임풀의 총감독. 자녀로 아들 호시노 카즈키와 딸이 있다. [본문으로]
  14. 원문은 1976년이라 되어 있으나 1976년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시즌 6위를 기록했고 호시노 카즈요시는 4위를 기록했다. 이해 챔피언은 미스터 GC라 불린 타카하라 노리타케(高原敬武) [본문으로]
  15. 1954년 이탈리아 파두아 출신으로, 1976년 FIA 유러피언 F3 챔피언, 같은 해 이탈리안 F3 챔피언, 1982 WSC 준우승, 1992 포뮬러 1 준우승자 [본문으로]
  16. 1954년 영국 뉴햄프셔 출신, 1978년 반더벨 브리티시 F3 챔피언, 1992년 WSC 챔피언이며 그 해 르망 24시간 우승자. [본문으로]
  17. 1984년 프랑스 폰차라 출신으로 1977년 유럽 F2 챔피언, F1 최고 성적은 1983년 3위. [본문으로]
  18. 이 경주차는 1976년 호시노 카즈요시가 탔던 경주차라고 한다. [본문으로]
  19. 이 경기 중 차량의 추돌 여파로 인해서 이 둘이 세상을 떠났다. [본문으로]
  20. 당시 전일본 포뮬러 3000 챔피언십 제8전 후지전에서 3위 기록 [본문으로]
  21. 일본어 : 全日本耐久選手権/영어 : All Japan Endurance Championship [본문으로]
  22. 일본어 : 全日本スポーツプロトタイプカー耐久選手権/영어 : All Japan Sports Prototype Car Endurance Championship. [본문으로]
  23. 1980년 중반부터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어드반 브랜드의 모기업인 요코하마 고무와 계약을 맺고 활동했다. [본문으로]
  24. 스즈카 1000km은 당시 JSPC의 대회 중 하나로 개최되었다. [본문으로]
  25. 다만 현재 스즈카 10시간은 열리지 않고 있고, 후지 1000km과 WEC의 후지 6시간을 일본에서는 구분하는 것으로 보이나 외국에서는 같이 보는 것으로 판단된다. - 역자 주 [본문으로]
  26. 1980년대에 팔린 미쓰비시의 스포츠카. 후속은 GTO. [본문으로]
  27. 팀 쿠니미츠는 1994년 전일본 GT 챔피언십 개막전이 아닌 제3전인 재팬 스페셜 GT 컵에 처음 참전했다. [본문으로]
  28. 현재의 LMGTE와 다른 규정이다. [본문으로]
  29. 1949년 일본 시즈오카 출신, 토코하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즈오카 마쯔다에 입사해서 1972년 레이스 데뷔, 1982년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이후, 1983년부터 토요타 계열 팀인 톰즈와 계약을 맺고 전속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2000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톰즈의 감독 및 토요타 모터 스포츠 클럽 회장을 역임했으며, 포뮬러 토요타 레이스 스쿨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모터스포츠 진흥에 공을 들이고 있다. 르망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내가 톰즈의 서비스 서포터 출신으로 르망 현지에서 1987년에 결혼한 이력이 있다. [본문으로]
  30. 2021년 3월 31일을 끝으로 브랜드 폐지. [본문으로]
  31. 일본의 자동차 및 레이싱카, 산업 디자이너인 유라 타쿠야가 1975년에 세운 회사 [본문으로]
  32. 야마구치현 미네에 위치했던 서킷. 2002년까지 대회가 열렸고, 현재는 마쯔다의 주행시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식명칭 CP미네 서킷 [본문으로]
  33. 당시 명칭 ALL JAPAN FUJI GT RACE. 500km으로 열린 것은 2001년이 최초로 500km 레이스는 본래 후지 롱 디스턴스 시리즈의 일환으로 열리던 대회 중 하나를 전일본 GT 챔피언십에서 부활시킨 것이다. [본문으로]
  34. 본문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고인은 1998년 이이다 아키라, 하세미 마사히로와 함께, 2륜 아마추어 대회인 모테 내구에 출장하였으며 1997년과 1998년 스즈카 8시간 내구에서는 팀 쿠니미츠.HSC 명의로 참가해 고인이 명예총감독으로 참가했다. [본문으로]
  35. 슈퍼 GT의 운영기구. 반도 마사아키가 회장직에 오르면서 주식회사로 조직을 변경했다. [본문으로]
  36. 山本尚貴, 1988년 도치기현 우츠노미야 출신, 2010년 팀 쿠니미츠로 슈퍼 GT에 데뷔, 사실상 타카하시 쿠니미츠 감독의 마지막 애제자라 불릴 정도로 슈퍼 GT에서는 2013년, 2014년을 제외하면 팀 쿠니미츠에서 쭉 달렸다. [본문으로]
  37. 2010년에 웨이더 혼다 레이싱(=도무)의 혼다 HSV-010 GT(드라이버 : 코구레 타카시, 로익 듀발)이 시즌 챔피언을 차지, 이는 2000년의 미치가미 료, 2007년의 이토 다이스케, 랄프 파먼 이후 3번째이다. [본문으로]
  38. 牧野任祐, 1997년 오사카 출신, 코우코쿠 고교 졸업, 2005년에 카트로 레이싱에 입문했으며 2015 JAF F4 동일본 및 서일본 시리즈 챔피언을 차지함과 동시에 그해 FIA-F4 챔피언십 2위를 기록했다. 2016년 SGT에 데뷔, 2018년에는 FIA F2에도 참전, 2019년에 일본으로 복귀해 2020년부터 팀 쿠니미츠에 소속되었다. [본문으로]
  39. 이건 여담이지만 이 사고 영향인지, 사토 렌은 2022 시즌 슈퍼 GT에서 시트를 얻는데 실패, 슈퍼 포뮬러에서 팀 고 소속으로 그해 신인왕에 올랐고 2023년 나카지마 레이싱으로 이적했는데...... 하필 야마모토 나오키와 파트너를 짜게 되어 당시를 기억하는 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본문으로]
  40. Ministry of Education, Culture, Science, Sports, and Technology [본문으로]
  41. 이후 2023년에 호시노 카즈요시, 하세미 마사히로가 고인의 뒤를 이어 표창을 받았다. [본문으로]
  42. 熊倉重春,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의 유명 자동차 잡지인 카그래픽의 편집장을 지냄. [본문으로]
  43. 원문은 "일본의 레이서 중 장인이라면 나카코 오사무, 천재라면 타카하시 쿠니미츠"(日本のレーサーで職人といえば中子修、天才といえば高橋国光) [본문으로]